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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20th-Century Art Book 20세기 아트북 ㅣ 파이든 아트북 4
PHIDON 지음, 윤옥영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9년 10월
평점 :
거리의 햇살이 따뜻해지니 미술관에 가고 싶어진다. 노랗게 피어나는 개나리의 계절이 되면 나는 항상 미술관을 떠올린다. 봄 소풍 장소로 자주 찾곤 했던 미술관, 시간이 멈춰진 그곳에 가고 싶다. 높은 천장에 압도되고, 뚜벅뚜벅 복도를 가득 메우는 발소리의 울림이 좋아서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면서도 숨소리조차 조심했던 미술관, 그곳에 가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미술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줄 아는 교양인은 아니다. 예술가들의 예술작품은 사실 난해하기 그지없다. 대가의 작품을 마주하고 서 있어도 어떤 부분에 감상 포인트가 있는지 눈치 채지 못할 때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난해한 연주곡 때문에 금세 지루해지곤 했던 음악회와는 달리, 미술관은 이해할 수 없는 그 영역조차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친구들과 미술관에 가면 저마다 한참 머물러 서게 되는 작품이 제각각이었다. 그럴 때마다 서로 "뭘 보고 있어?"라고 물으면, 우리는 그저 "그냥, 이 작품이 나를 끌어당기네"라고 대답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이해하겠다는 듯 서로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여줬었다.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코드는 많다. 시대를 반영하면서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 세계도 다양하다. 그 많은 코드와 다양한 예술 중에서도 특히 ’미술’에 주목하는 이유는 미술이 가장 앞서가는 예술이라는 신뢰 때문이다. 미술이 가진 상상의 세계, 표현의 세계는 어떤 예술의 세계보다 무한하다. 미술이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은 특별한 지식이 없어도 ’느낌’으로 도달할 수 있는 꼭짓점이 있다는 것이다. 미술을 감상하는 일에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마로니에북스의 <20세기 아트북(The 20th-Century Art Book)>을 보고 나는 짧은 탄성을 질렀다. 마치 나만의 미술관이 생긴 기분이랄까. 500페이지에 달하는 큼직한 컬러도판 안에 20세기 미술 작품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20세기 미술의 동향을 한눈에 파악하며, 20세기를 주도한 미술 작품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설렘이 마음 가득 피어났다.
"20세기는 다른 어느 시기와도 비길 수 없이 수많은 미술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양식을 제공했다. 20세기는 발명과 발견, 정치적 격변으로 빠르게 변하는 시기였고, 그 결과 미술의 장도 급진적으로 변화했다."
무엇보다 20세기 미술은 ’급진적’이었다는 점에 끌린다. 격동과 격변으로 대변되는 20세기의 시대상이 미술의 흐름에도 나타난다. 다양한 매체를 가지고 실험적으로 이루어진 미술 동향 중에서도 특별히 여성 미술가들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설명이 눈에 띈다.
"The 20th-Century Art Book은 A부터 Z까지 이르는 미술가들의 이름 순서에 따라, 이 특별한 시대의 미술에 대한 안내를 제공한다."
A부터 Z까지 미술가들의 이름 순서에 따라 백과사전적으로 구성된 <20세기 아트북>은 20세기를 대변하는 시대적인 특징과 변화의 핵심을 군더더기 없이 집어준다.
소개되는 화가와 작품 중에 가장 인상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당황스러웠던 작품은 ’애드 라인하르트’(Reinhardt, Ad)의 ’검은 회화 34’(Black Painting No. 34)이었다. "검은 물감이 캔버스를 완전히 뒤덮고 있다. 오직 직사각형 두 개의 흔적만이 물감의 장막 속에서 겨우 보일 듯하다"(384). 이 작품 안에 숨겨진 메시지는 무엇일까, 한참을 고민하고 작품 해설을 읽었다. 나는 20세기 미술 작품을 여행하고 난 감상을 한마디로 말하기 위해 이 작품을 선택했다. 검은 물감밖에 보이지 않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겨우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두 개의 직사각형을 품고 있는 회화, 그 안에 이런 거대한 음모가 들어 있다. "미술 창작의 작업을 과거의 작품에 대한 계속적인 반작용으로 보면서 라인하르트는 ’환상, 암시, 기만이 배제된’ 양식을 목표로 하였다." 저항적이면서, 실험적인 이 작품의 도전에 20세기 미술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처음 마주보면 캄캄하지만 자세히 보면 무엇인가 보인다는 점에서도, 20세기 미술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좋은 책을 만났을 때 가질 수 있는 만족과 희열을 제대로 맛보게 해주는 책이다. 20세기 예술은 물론 시대를 보는 시야까지 넓혀주며,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눈까지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주는 만족도 100%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