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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박서양
이윤우 지음 / 가람기획 / 2010년 1월
평점 :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한국인 최초의 양의사가 된 남자, 박서양!
역사적으로 볼 때, ’평등’이란 이념을 한 번도 제대로 실현해보지 못한 인간 사회가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할 지경이다. 나면서부터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을 구분 짓던 ’미개한’ 신분제도가 많은 부분 폐지되고 지구상에서 사라져가고 있다고 하지만, ’평등 사회’를 대표하는 국가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신분은 여전히 존재한다. 어느 사회이든 차별적인 계급이 있고, 구별되는 계층이 있다. 인간의 존엄과 존재의 평등을 부르짖는 사회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신분은 존재의 ’가치’를 차별하고, ’차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대접받아 마땅한 사람’과 ’차별받아 마땅한 사람’을 나누는 견고한 신분의 벽, 그것은 가진 자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천한 자의 기회를 박탈하는 원초적인 사슬이다. 어쩌면 인간의 역사는 ’높은 신분’을 차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인지도 모르겠다. 밟지 않으면 밟힐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우리도 ’미개한’ 신분제도 안에 갇혀 살았었다. 그 넘지 못한 신분 벽 중에서도 가장 견고한 벽 안에 갇혀 모든 계급으로부터 짓밟히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천대받았기에 바닥의 인생을 바닥이 뭔지도 모르고 살게 되는 사람들, 바로 ’백정’이라 불렸던 사람들이다. 한국인 최초로 양의사가 된 한 남자의 일대기를 조명한 <제중원 박서양>에 특별히 더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그가 바로 ’백정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최초의 양의사’가 ’백정’ 출신이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 인생의 험난함과 그가 일구어낸 투쟁의 치열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왕은 김옥균 등이 개화를 명목으로 일본군을 끌어들인 것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깨닫게 될 때마다 화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28).
백정의 아들이었던 박서양이 조선인 최초의 양의사가 될 수 있었던 기회의 문은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수치와 모욕을 안겨주었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열렸다. 아니, 그렇게 큰 역사의 소용돌이가 아니었다면 백정에게 ’배움’의 길이 열린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것이다.
그러나 개혁하고자 했던 신분제의 폐지는 ’의식’의 개혁 없이 진행된 일부 계층의 ’반역’이었다. 의식의 개화가 없는 개혁은 ’박서양’으로 하여금 백정이면서도 백정이 아니고, 백정이 아니면서도 백정인 삶을 살게 했다.
"너에게는 열린 환경이 필요할 뿐이니까"(256).
바닥에서 살면서도 바닥인지 모르고, 바닥에서 일어서 본 적이 없기에 항상 그것이 이 세상의 전부인 양 믿고 살았던 박서양에게 바닥이 아닌 다른 인생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은 자신을 제중원에 버린 아버지와 그를 변화의 상징으로 내세우고 싶었던 선교사 ’알렌’이었다.
그러나 ’서양 의학’은 박서양에게 환희인 동시에 혼란이었다(237). 한 번 찍힌 ’백정’이라는 낙인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여전히 선명했으며, 어디를 가든 누구와 만나든 ’백정’이라는 꼬리표가 평생을 따라다니며 번번이 그를 좌절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그것을 떼어내지 못한 박서양에게 ’서양 의학’이라는 기회 자체가 그를 완전히 파괴해버릴 수도 있을 만큼 잔인한 희망이었다.
박서양에게 필요한 ’열린 환경’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기회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서양은 조금만 달콤하고 화려한 것을 맛보게 해주는 사람에게는 그 즉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정도로 쉽게 마음을 주고 비굴해졌다"(256). 그는 ’외과 의술’을 익히기 위해서도 고군분투해야 했지만, 그보다 더 절실했던 과제, 더 치열했던 싸움은 스스로 자존감을 기르는 일이었다. 다행히 그는 스승을 잘 만났다. "기억해라. 의술을 배우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의술을 행하는 태도를 배우는 것이, 어떻게 의원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배우는 것이 정말 어려운 거지. 자존감을 만들고, 자신감을 기르고, 의원으로 사는 법을 배워라"(256).
"사람의 욕심과 허영이 얼마나 괜찮은 일들을 많이 이루어내는지 보아왔으니까요"(319).
역경을 극복한 위인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역경’이 오히려 변화와 성공의 동역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한국인 최초의 양의사가 된 박서양은 그것에 하나의 교훈을더 보탠다. "욕심과 허영, 자기 존재에 대한 분노만 가진 삶은 괴롭고 고통스러우며 지금의 육손이처럼 온전한 자존감만을 가진 삶은 움직임을 갖지 못한다"(319).
"자네는 어느 쪽인가?"(322)
<제중원 박서양>의 작가 이윤우가 ’박서양’의 삶을 재조명하며 진짜 보여주고자 한 핵심은 그의 삶 후반부에 등장한다.
박서양이 일본에서 의술을 익히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망해가는 조국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약소국을 삼키려는 열강의 다툼, 그 틈바구니에서 제 잇속을 채우기에 급급한 기회주의자들이 득실대는 조국은 ’독특한 지위’를 가지게 된 백정에게 주목했고, 그의 정체성을 의심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일본유학을 했으니 친일파라고 믿더군. 그러면서도 서양 의학을 배웠으니 정동파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고, 자네나 홍재우 나리와 인연이 있으니 황제를 지키고 싶어 하는 근왕파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더라고"(322).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의사’가 되어 돌아온 ’백정’ 박서양은 ’이용 가치’가 높았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보며 내 위치를 헷갈려 할 여러 이름들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다른 목적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나를 써먹을 수 있을 거라 여기는 것 같다"(293).
박서양이 본격적인 의술을 익힌 곳은 그의 과거에 관심이 없는, 그를 단지 한 사람의 의사로 대해준 ’일본’에서였다. 그는 8년여의 교육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에게 조국은 여전히 그를 의사가 아닌 백정으로 대우하는 나라였다. "내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자신감을 잃었다. 내가 배우고, 또 행했던 모든 의술들이 잡을 수 없는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302).
그는 왜 일본에서 편히 먹고살지 않았을까. 조국은 그를 버렸다. 태어날 때부터 버려진 인생이었다. 조국은 그를 차별했고 멸시했고 증오했다. 조국에서 백정 박서양은 행복해서는 안 되는 인간 짐승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조국으로, 그것도 국운이 다한 조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전에는 그를 짐승만도 못하게 여기던 자들이 이제는 그를 ’이용’하려 했다. 그는 누구의 손을 잡느냐에 따라 부와 권력을 거머쥘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멸시하고 모욕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을 수도 있었다.
과연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제중원 박서양>이 전하는 감동은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한국인 최초의 양의사가 된 한 남자의 ’성공’이 아니라, 바로 그의 ’선택’에 있다. 마치 미스터리 소설의 퍼즐처럼, 이야기의 막바지에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이 제자리에 맞춰지면서 비로소 완성되는 박서양이라는 한 남자의 삶의 그림은 우리 역사가 남겨준 소중한 유산이다. <제중원 박서양>의 이야기는 같은 레퍼토리만 지겹게 반복되는 삼류 통속극처럼, 참으로 질기게 따라붙는 ’백정’의 고난사가 지루할 만큼 거듭 반복된다. 그러나 그런 ’백정’의 삶이었기에 그 마지막 ’반전’에 더욱 전율하게 된다. <제중원 박서양>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