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운명의 별 김진규
김보애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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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배우 김진규를 추억하며 한국영화사를 읽다!


만인의 연인으로 사랑받는 화려한 스타도 사실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인생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그런데 그 새삼스러움이 싫지 않다. 그래서 대중들은 화면에 보이는 스타의 ’특별함’을 사랑하지만, 그 이면의 생활에도 그리 관심이 많은가보다. 보이는 화려함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평범한 삶을 엿보면서 ’스타도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동질감 속에 어떤 희열을 맛보기도 하고, 멀게만 느껴졌던 스타가 훨씬 친숙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 친숙함이 좋은 것이다. 

<내 운명의 별 김진규>는 한국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배우 ’김진규’의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한국 영화사이기도 하다. 배우 김진규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선정한 ’한국영화 100선’에 가장 많이 오른 배우라고 하니 그의 인생사가 한국영화사가 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귀결이라 하겠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김보애 선생님은 김진규 선생님의 두 번째 아내이기도 하면서, 역시 같은 영화배우로 활동하신 분이다. 김보애 선생님은 당신의 운명이었던 김진규 선생님과의 인연을 가감없이 진솔하게 들려주신다. 2009 ’조선일보 논픽션 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는 이 책은 ’정직성’에 많은 점수를 받은 작품이다. 당시 최고의 남성상이었다고 하는 잘 생긴 배우 ’김진규’. 그러나 이 책은 그의 화려한 겉모습이 아니라, 그의 감추어졌던 속살까지 솔직하게 다 보여준다.

1961년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과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이라는 영화가 일대 접전을 벌였던 이야기, 그 유명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벙어리 삼룡>에 얽힌 뒷이야기, 라이벌이었던 최무룡 선생님과 분장 하나에서도 밀리지 않으려고 경쟁적으로 삭발을 했던 이야기, 영화와 정치와의 상관관계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책장을 술술 넘어가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끈끈하게 나의 마음을 잡아끈 것은, 당대 최고의 미남 배우였던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는 여자 김보애의 삶이었다. 열아홉의 아가씨가 자신의 어머니보다 4살밖에 젊지 않은 30대 중반의 이혼남이면서 두 아이의 아버지인 남자와 결혼을 감행하며 걷게 되는 운명의 길이 한 편의 영화처럼 파란만장하다. 그런데 이 김보애라는 여성은 참으로 씩씩하고 당차게 헤쳐나왔다. 

경제적으로 심한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혼자만 소유할 수 없었던 사랑, 많은 사람과 남편을 나눠가져야만 했던 스타 배우의 아내라는 그녀의 운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극히 통속적이지만 인생이란 원래 통속적이 아니던가. 열성 팬들의 극성도 극심한 스트레스였을텐데, 한 여류 시인과 남편의 추문을 지켜봐야 했던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쓰렸을까 생각만으로도 절절해진다. 그녀의 인생에서 그녀가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었다. 이혼을 결심하고 쏟아내는 그녀의 절규 속에 한 여인으로서 감내하기 힘들었던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시인과 사귀면서 나를 정신적으로 고문하더니 이제는 이름도 모르는 유부녀들과 어울리며 나를 학대하는데, 제가 견딜 수 있겠어요? 당신 눈에는 내가 애들 어미로만 보이겠지만, 전 아직도 30대 중반이에요. 앞길이 구만리라고요. 이젠 제 인생을 살겠어요. (...) 당신은 그 여자 곁에 가서 쉬고 계세요. 만약 우리의 인연이 이걸로 끝이 아니라면 언젠가 또 만날지도 모르죠."(175)

그녀는 운명을 예감했던 것일까? 그렇게 헤어졌던 남편과 운명처럼 다시 만난다. 그 많은 세월을 건너 늙고 병들어 지칠 대로 지친 육신으로 다시 앞에 선 남편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죽기 전 5년 여를 함께하고, 임종을 지켰다. 그녀는 이것이 ’이별을 위한 재결합’이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자신의 운명과 이별을 했지만, ’김진규’라는 배우는 그녀 가슴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운명의 별로 남아 있다.  

이야기를 끝내며 들려준, 대선배 윤인자 선생님과의 재회가 참 쓸쓸하고 아리다. 화려한 조명도, 빛났던 청춘도, 열정으로 가득찼던 배우 생활도, 열병 같던 사랑도, 어느새 모두 스쳐 지나가버리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배우 곁에 ’그림자’만이 단 한 명의 친구로 남았다. 

"내게도 딱 한 명 친구가 있지."
"그게 누구에요?"
"그림자야. 해가 뜨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내 친구지. 내가 일어나면 일어나고 내가 누우면 저도 눕고. 그런데 구름 끼고 비 오면 오질 않아. 그래서 난 비 오는 날이 제일 싫어, 친구가 없으니까."(277)


이 평범한 대화가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깊이 내 마음에 남는다. 죽을 때도 천상 배우였던 ’김진규’를 추억하며 지나온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두 여배우의 모습에서, 쉽게 식어버리는 대중의 사랑, 그 끝자락이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화를 사랑하고,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책에 기록된 한 분, 한 분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싶어진다. 영화인이요 문화인으로서 김보애 선생님의 멈추지 않을 행보를 응원하며, 오늘의 한국 영화가 있기까지 터전이 되어주고 씨앗이 되어준 모든 영화인 선생님들에게 한국 영화를 사랑하는 한 명의 팬으로서 뒤늦게나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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