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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 조선의 마지막 황녀
권비영 지음 / 다산책방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덕혜옹주,
이제야 당신을 위해 울었습니다.
이제라도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비참하게 버려진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를 읽으며 어설픈 애국심 따위는 버리려고 했다. 나라를 잃고 비참하게 버려진 삶이 어디 그녀 하나뿐이었는가. ’조선의 마지막 황녀의 삶’이라는 타이틀에는 관심이 갔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호기심이었다. 기억은커녕 존재했었는지도 모르는 처음 듣는 이름의 옹주, 나라의 운명이 그녀만의 비극은 아니었기에 조금은 냉정한 시선으로 읽으리라, 작정했다.
물었다. "덕혜옹주가 대체 누구요?"(406)
조국은 그녀를 기억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조국과 운명을 같이 했다. 그녀에게 닥친 운명은 분명 한 여인의,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조선의 황녀’로 태어났으나 그녀는 ’조선 왕가의 마지막 핏줄’이 되었다. 그녀는 철저히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살았다. 명을 다한 조선의 황녀로 산다는 것은 일본의 허락 없이는 이름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끊임없는 일본의 감시와 간섭 속에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죽음이 독살이라는 것을 알아도 모르는 척 해야 함을 의미한다. 조국에서 살 자유도 없음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만날 자유도 없음을 의미한다. 그녀는 ’조선의 황녀’였기 때문에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살았고, 일본인과 강제로 결혼해야 했다. 조선의 황녀였기 때문에 말이다.
조선의 황녀였기에 그러한 삶을 살았지만, 조국은 그녀를 지킬 수 없었다. 조국이 이런 저런 탓을 하며 그녀를 잊었듯이 그녀도 조국을 잊고 차라리 그저 한 여인으로 살았으면 좋으련만, 이 가여운 여인은 끝내 조국을 품고 살았다. 자신이 ’조선의 황녀’임을 놓지 않았다. <덕혜옹주>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시련은 조국을 잃은 것도,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은 것도, 보고 싶은 어머니 곁에 가볼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강제로 결혼하여 일본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바로 자신의 핏줄이었다. 일본이 그렇게 짓밟고 파괴하려 했으나 그 고결한 영혼 깊은 곳에 숨어 고이 간직되어 오던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일본인도 될 수 없고 조선인도 될 수 없는’ 그 딸로 인해 무너져 내렸다. 일본 땅에서 일본인의 아내로 살지만, 조선의 황녀임도 놓을 수 없고 자신의 딸도 놓을 수 없었던 덕혜옹주는 자신의 정신을 놓아버렸다.
일본인 남편은 결국 그녀를 버렸다. 패망한 일본도, 해방을 맞이한 조국도 모두 그녀를 잊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국보다 오히려 원수들이 그녀에게 더 관심을 가졌으나, 그들이 잊어버리자 누구도 기억하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덕혜옹주는 그렇게 15년 간 정신병동에 감금되었고, 결국 그녀의 딸도 그녀를 버렸다.
"그녀는 한 여인이기 이전에 조선의 황녀였다. 지금은 일본의 볼모가 되어버린 황녀. 그는 일본이 조선을 삼키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아니 적어도 일본이 그녀를 볼모로 삼지 않았다면."(171)
"삶은 원칙도 없고 배려도 없다. 사납게 휘두르는 운명의 갈퀴를 막을 힘"(306)은 누구에게도 없다. 높은 지체를 타고난 사람이나, 천하게 태어난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운명이 덕혜옹주에게만 유독 가혹했다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국을 잃은 자들에게는 사랑도 사치"(171)라고 하지만, 멸망한 나라의 황녀에게는 존재 자체가 사치였다.
한 여인이기 이전에 조선의 황녀였던 덕혜옹주가 차라리 나라님이라도 원망할 수 있는 힘없는 백성이었다면, 그녀의 비극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떠넘겨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조선 황녀의 억울한 삶을 목격하고도 도대체 누구에게 이 안타까움을, 이 분노를 쏟아놓아야 할지 모르겠다. 나의 양심이, 내가 타고난 이 민족의 피가 어설픈 애국심을 허락하지 않으리라 도리질을 했던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피 끓는 절규를 한다. 내가 온전히 디디고 사는 바로 이 조국의 이름으로(!) "비참하게 버려진 조선 마지막 황녀의 비극적인 삶을 기억하라!"고 말이다.
"내가 조선의 옹주로서 부족함이 있었더냐."
"옹주의 위엄을 잃은 적이 있었더냐."
"나의 마지막 소망은 오로지 자유롭고 싶었을 뿐이었느니라……."(403)
’나라를 잃고 비참하게 버려진 삶이 그녀 하나’뿐은 아니지만, 덕혜옹주는 해방 후에도 우리가 미처 다 찾지 못한 대한민국의 자존심이며, 그 치욕의 역사를 딛고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민족 긍지의 상징이다. 작가 권비영의 <덕혜옹주>는 우리가 나라의 자존심을 지키며, 민족의 긍지를 세워나갈 역사의 한 자락을 우리 손에 다시 쥐어주었다. 덕혜옹주 홀로 싸워 지킨 ’조선 황녀의 위엄’을 찾아주었다. 그녀를 잃어버리고, 그녀를 잊어버린, 우리는 이제야 그녀를 위해 울고 있다. 그러나 이제라도 그녀를 기억해야 하리라. 대한민국 후손의 이름으로 덕혜옹주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자유를 선물하는 일, 우리의 기억 그곳에서부터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