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그책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싱글맨>으로 살아가는 남자의 어느 한 날.


잠에서 깨어나는 남자. 마치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린듯 그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여기’를 겨우 깨닫는다.  그가 느끼는 것은 ’살아서 죽어가는 이 생명체’, 바로 자신의 늙은 육신이다. 육신을 움직인다. 육신과 정신이 한 몸에서 분리되어 있는 듯, 자신의 육신을 타자처럼 바라본다. 거울에 비친 얼굴, 화석처럼 죽어 있는, ’이 얼굴을 가진 너는 누구냐’고 묻지도 않는다. 그저 육신의 이름을 기억할 뿐이다. "육신은 조지로 불린다."(9)

익숙한 듯, 낯 선 듯, 좁은 공간 안을 움직이던 그를 불현듯 덮쳐오는 것이 있다. 그에 대한 기억 그리고 상실의 확인, 그를 잃어버린 통증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매일, 해마다, 이 좁은 장소에서, 작은 스토브 앞에 팔꿈치를 맞대고 서서 요리하고, 좁은 계단에서 간신히 서로 스쳐 지나가고, 작은 욕실 거울 앞에서 함께 면도하고, 계속 떠들고, 웃고, 실수든 고의든, 육감적으로, 공격적으로, 어색하게, 조급하게, 화나서든 사랑해서든 서로 몸을 부딪은 두 사람을 생각하라. 두 사람이 곳곳에 남긴, 깊지만 보이지 않는 길들을 생각하라! 주방으로 가는 문은 너무 좁다. 손에 그릇을 든 두 사람이 서둘러 가면 이 문에서 부딪치기 십상이다. 거의 매일 아침 계단 아래를 내려온 조지가 자기도 모르는 새 갑자기 참혹하게 꺾인 듯, 날카롭게 갈린 듯, 길이 산사태로 사라진 듯 느끼게 되는 곳도 여기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늘 처임인 양 또다시 통증을 느끼게 되는 곳도 여기다. 짐은 죽었다. 죽었다."(10-11)

흐릿한 자신, 오직 그가 죽었다는 사실만이 선명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가장 괴로운 순간은 언제일까? 그가 있던 자리, 그곳에서의 추억, 그가 남기고 간 것들, ’그’만 빼고 모두 제자리에 있는 물건,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숨이 막힐 듯 차오르는 통증, 조지는 그것이 "참혹하게 꺽인 듯, 날카롭게 갈린 듯, 길이 산사태로 사라진 듯"한 통증이라고 묘사한다.

얼마 전, 매일 함께 자고, 함께 놀던 강아지를 잃었다. 그후로 함께했던 습관이 하나씩 떠오를 때마다 바늘을 하나씩 삼키는 심정이었다. 매일 아침 출근 길에 "맛있는 거"를 외치며 하나씩 주었던 간식, 주인을 잃은 간식 봉지를 들고 이걸 어째야 하나 도무지 알 수 없는 아침이 있었다. 그 아침이 조지의 아침과 겹쳐진다. 그렇게 조지의 하루가 시작된다.

58세의 조지. 대학교 교수이고, 미국에 사는 영국인이다. 얼마 전 사랑하는 사람을 교통사고로 잃은 그는 ’동성연애자’이다. 1962년의 미국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홀로 동성연애자로 살아가는 남자의 하루는 텅 비어 있다. 

이웃 주민을 만나고, 고속도로를 운전해서 학교에 도착하고, 학교 테니스 코트를 지나, 강의실에 들어가고, 동료 교수를 만나고, 식사를 하고, 한때 연적이었던 여인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들르고, 스포츠 센타에서 운동을 하고,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오랜 여자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고, 술집에 가고, 그곳에서 제자를 만나고, 잠이 들 때까지, 그는 자신이 ’조지’인 척 연기를 한다. ’모.든. 것.’으로부터,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동떨어진 삶. 어느 순간 잠시 진짜 조지가 되었다가도 곧 끔찍하게 자기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그저 움직이는 그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순간은 짐을 잃어버린 통증을 느낄 때 뿐인 듯 하다. 짐과 함께 갔던 슈퍼, 짐을 처음 만났던 술집, 그렇게 불쑥불쑥 찾아드는 "그 기억들은 조지를 칼로 찌른다."(126)


"그러나 조지가 계속 살아가고자 한다면, 조지는 잊어야 한다. 짐은 죽었다."(209)

조지도 짐을 잊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는 살고자 한다. 살려면 그의 과거가 된 짐을 잊어야 한다. 늙어가는 그에게 미래는 없다. 그는 두렵다. 그래서 "조지는 현재만 끌어안는다. 현재에 조지는 새로운 짐을 찾아야 한다. 현재에 조지는 사랑을 해야 한다. 현재에 조지는 살아야 한다......"(210) 그런데 조지에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조지의 육신에서 분리된 정신인가? 갑자기 등장한 작가인가? 지금까지 조지를 따라다니며 그를 지켜본 바로 ’우리’인가?

<싱글맨>을 우리말로 옮긴 이는 이 책의 배경이 되는 1962년 겨울이라는 배경이 꽤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실재하지 않은 위기가 거대한 공포감을 만들어낸 시기. 그 거대한 공포 속에 조지의 하루가 놓여 있다. 지독한 상실감, 늙어가는 몸에 대한 두려움, 소수자로 살아가는 고독 안에 잠긴 독자라면 자신의 삶과 겹쳐지는 조지의 하루에 깊은 공감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 이해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조지, 그의 곁에 다가가는 한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떻게 시작해야 조지의 마음에 가닿는 대화가 가능할까?

"자네들 젊은이들은 캠퍼스에서 아무렇지 않게 나한테 다가와서 나더러 비밀스럽다고 말하지. 세상에나, 비밀스럽다니! 생각이 거기까지밖에 못 미치나? 내가 얼마나 대화를 그리워 하는지 희미하게라도 알아챌 수 없나?"(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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