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슨의 미궁
기시 유스케 지음, 김미영 옮김 / 창해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스릴러의 절대 강자, 기시 유스케!
역시 기시 유스케다! 이런 이름을 붙여도 된다면, 그를 ’심리 스럴러’의 대부라고 부르고 싶다. <13번째 인격>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그의 해박한 ’심리학’ 지식이 문학 작품 안에 녹아들면서 다시 한 번 그 진가를 드러냈다. 조심하라! 작가는 인간의 심리를 꿰뚫고 있다! 작가의 예리한 시선에서 독자도 자유로울 수 없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야?"
후지키. 몸을 움직이다가 자신이 평소와는 다른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가 어디지?’ 혼란스러운 의식 속에서 눈을 뜨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마치 화성에라도 떨어진 듯, 심홍색(크림슨)으로 물들어 있는 괴이한 세계에 자신이 있다. "협곡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은 그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이런 곳이 존재하리라고 상상해본 적도 없을 만큼 기이했다."(7)

"화성의 미궁에 온 것을 환영한다."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이며 끊긴 기억을 더듬으며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를 쓰는 그 옆에 물통과 도시락 통, 은색 파우치 하나가 놓여 있다. 파우치 안에는 휴대용 게임기가 들어 있었다. 게임기를 작동시키니 화면 가득 한 문장이 나타났다. "화성의 미궁에 온 것을 환영한다."  

누가 있다, 그리고 게임은 시작되었다.
후지키는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 게임기 속의 메시지를 진짜로 받아들이는 자신이 어이없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혼자가 아니다. 누가 있다! 후지키를 포함해 모두 9명의 일본인이 미궁 안에 갇혀 있다. 깨져버린 한 개의 게임기를 제외하고, 8명이 소지한 각각이 게임기에는 모두 다른 메시지가 들어 있고, 게임의 규칙을 알려 준다. 누구도 왜 이 게임에 참여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지만, 누군가의 의도대로 게임에 임하는 수밖에 달리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게임은 시작되었다!

"서바이벌을 위한 아이템을 얻으려는 자는 동으로, 
호신용 아이템을 얻으려는 자는 서로, 
식량을 얻으려는 자는 남으로, 
정보를 얻으려는 자는 북으로 가라."(67)

9명의 게임 참가자는 각자의 선택에 따라 동서남북, 이렇게 4팀으로 나뉘게 된다. 후지키는 이런 상황에서 우선 순위는 식량이라고 생각하고 남쪽 루트를 선택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게임에서는 누구나 고를 확률이 높은 선택지는 대개 함정인 경우가 많다고 후지키를 설득하는 '아이'라는 여성의 의견에 따라 ’북쪽 루트’를 선택한다. 이로써 후지키와 아이는 한 팀이 된다.

제로섬게임(zero-sum game)! 모두가 경쟁자다. 살아남고 싶다면, 배신하라!
오직 한 명만이 승자가 될 수 있다는 게임의 규칙은 극한 상황으로 치달을수록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자극한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 동쪽 루트를 선택한 팀은 서바이벌을 위한 일부 아이템을 감추고, 서쪽 루트를 선택한 팀은 호신용 아이템의 일부를 감추고, 남쪽 루트를 선택한 팀은 식량의 일부를 감추고, 북쪽 루트를 선택한 팀 역시 중요한 정보를 감춘다. 단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게임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게 오락이라고? 
인간은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을까? 배고픔의 욕망을 견디지 못하고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식인귀’가 더 공포스러운가? 그런 장면을 오락으로 즐기는 인간이 더 공포스러운가? 기시 유스케는 <크림슨의 미궁>에 갇힌 9명의 사람을 지켜보며, 흥미진진해 하는 독자들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듯하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항상 이야기를 바란다. 영화, 소설, 만화, 게임 등 형식은 달라져도 이야기 자체가 소멸되는 일은 없다. 그 가운데서도 죽음을 그린 이야기는 변함없이 꾸준한 인기를 누린다. 등장인물이 작품 속에서 실제로 죽는 영화가 있다면 그보다 더 스릴 넘치는 오락도 없을 것이다. ... 사는 게 지루한 부자들의 외도로서는."(400) 

요즘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인 가운데 몇몇 프로그램들이 재미를 위해 방송을 조작했다는 논란에 종종 휩싸이는 것을 본다. 리얼리티를 원하지만 단순한 영상만으로는 시시하고, 그렇다고 재미를 위해 조작된 이야기라면 흥미가 떨어진다. <크림슨의 미궁> 안에서 벌어지는 서바이벌 게임도 재미를 위한 어느 정도의 편집과 각색이 들어 있다. 게임참가자는 어느 정도 미리 의도되고 연출된 상황에 던져진 것이다. 공포스러울수록, 잔혹할수록, 재미는 배가 된다. 기시 유스케는 더 자극적인 공포를 원하는 독자의 심리를 비웃는 듯하다.

처음부터 긴장과 불안 속에 시작되는 서바이벌 게임 <크림슨의 미궁>은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게임을 둘러싼 미스테리가 독자의 궁금증을 자극하면서 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게 만든다. 드러나는 공포 이면에 숨겨진 미스테리, 작가는 그 미스테리를 추적하는 독자와 한판 승부를 벌이듯 풀릴 듯 풀릴 듯 하면서도 좀처럼 그 실체를 밝혀주지 않은 채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불안과 의심이 불러오는 인간의 사악한 본성, 먹을 것이 많다는 정보를 공유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되는 상황, 게임에서는 예측가능한 합리적인 선택이 더 불리한 이유 등 끊임없이 경쟁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자화상과 게임이론 등을 확인할 수 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벙글벙글 지역과 원주민 애버리진의 전설까지, 문학적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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