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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 A
조나단 트리겔 지음, 이주혜.장인선 옮김 / 이레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대중적인 공포는 때로 ’횡포’가 된다.
두려움의 강도가 ’공포’로 변하면 그 두려움을 방어하기 위한 공격성이 튀어나오는데, 대중이 발산하는 집단적인 공격성은 공포심을 적개심으로 변질시킨다. 여기에 매스미디어까지 가세를 하면 정보는 공포를 ’조장’하고, 이성은 공포를 ’과장’하여, 대중의 적개심은 겉잡을 수 없이 맹렬해진다. 이 맹렬한 적개심의 화살이 특정 대상에게 집중될 때, 집단적인 광기가 나타나고 ’사회적인 횡포’가 자행되기도 한다.
<보이 A>는 "영국 범죄사상 가장 충격적이고 슬픈 사건으로 기록된" 실제 살인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영국인들을 경악케 한 것은 두 살된 남자아이를 끔찍하고 잔인하게 살해한 범인이 열 살밖에 안 된 십대 소년들이었다는 것이다. <보이 A>는 이중 한 소년이 복역을 마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는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실제 사건에서는 살해된 아이가 '두 살난 남자아이'였다고 하는데, 작가는 '열 살난 여자아이'로 설정을 바꾸었다. 그리고 매스미디어가 그 사건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보여준다. "죽기 전에도 천사의 모습에 가까웠던 한 여자 아이의 실제보다 미화된 사진이 신문에 실리면서 이 물음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요절은 죽음을 미화했다. 안젤라 밀턴도 어린 나이에 살해됨으로써 사람들의 눈에 완벽한 인간으로 미화되었다. 현대사회가 낳은 순교자로 비춰졌다"(304).
이 천사 같은 소녀를 살해한 소년이 '잭'이란 이름으로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석방 소식은 언론에도 알려졌다. 언론은 '그'가 어디로 가는지 대중들에게 알려 대중 스스로 이 문제에 대처할 수 있게 해야 한다며, 그의 행방을 뒤쫓았다. 적어도 내 이웃에 어떤 사람이 사는지 알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대중들은 '그'를 두려워했고, 언론은 끊임없이 그를 찾아내 대중들에게 '위험'을 알리려고 했다. 그리고 결국 '잭'의 과거는 들통나고 만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여자아이를 구하는 바람에 언론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그는 '사회적인 영웅'이 되었으나, 그가 과거에 어떤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알려지면서 그는 또다시 사회로부터 '감시'의 대상이 되어, 결과적으로는 '격리'되고 만다.
<보이 A>를 읽으며 언론과 대중의 공포와 적개심을 '횡포'라고 해석하는 것은, 작가가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 때문이다. 마치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사회는 '사형에 처해 마땅한 자'의 범죄 행위만 '보지만', 책은 독자에게 그 범죄자의 (보이지 않는) 숨겨진 사연을 집중적으로 '보여주어' 독자를 설득하듯이, <보이 A>도 소년 A가 그처럼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환경을 '보여주고', 복역을 끝내고 평범하게 살아보려고 고투하는 그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대체로 우리의 사고는 보여지는 '한 단면'에 의해서 결정된다. 어떤 단편을 보느냐에 따라 선택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전지한 신'이 아닌 이상 A에서 Z까지를 모두 고려한 '통합적'인 사고는 사실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이 책의 목차는 A에서 시작해서 Z로 끝난다). 문제는 우리의 인식이 대중적으로, 사회적으로 조장되고 과장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 작가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잭은 아홉 달만 어렸어도 무죄였다. 살인을 어떻게 정의하고 등급을 매길 수 있을까? CIA가 세상을 정말로 변화시킬 수도 있었던 체 게바라를 무참하게 살해하는 것은 왜 정당화되었을까?"(304-305)
인간은 누구도 '절대 선'일 수 없고, 또 누구도 '절대 악'일 수 없다. 짝이 있어야지만 탈 수 있었던 노아의 방주에 짝을 지어 올랐다는 선과 악은 바로 내 안에도, 또 사회 속에도 공존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겸손하고 조심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내가 '신'을 믿고 의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진리(절대 기준)는 결코 인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CCTV 천국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보려 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