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타라
조정은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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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것을 타라, 타라, 타라, 타라


시선을 허공에 둔 채 덤덤하게 "부도났어"라고 그녀의 남편이 말했을 때, 얼굴에 대고 내뱉어진 담배 연기처럼 끈적한 공기가 내 얼굴을 향해 훅- 하고 숨을 쉬었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지금 좀 더워도, 지금 좀 끈적거려도, 이 밤 잠을 자지 못해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을 빠르게 읽었다. 소설이 아닌데 뒷 이야기가 궁금했다.

불편한 손님이 내 집, 내 방 안에 들어와 앉아있을 때처럼, 어서 그 손님이 가주기를 바라는데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안절부절하며 책을 읽어도 그녀의 불행은 좀처럼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악스럽지도 못한 이 여인이 백화점으로 나가 청소부 일을 시작하고, 밤청소를 하며 그렇게 석달을 살고, 강남의 고급 보석 매장에 매니저로 일한지 14개월째가 되어도 그녀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고, 그녀의 신분도 상승되지 않는다. 그녀의 삶은 오히려 현실감을 잃어간다. 몽유병자처럼 꿈 속 세상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듯 말이다.

습관처럼 올라탄 버스 안에서 문득 혼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봤다면, 무거운 몸을 이기지 못해 깜빡 졸다가 낯선 거리에서 깨어나 봤다면, 춥고 어둡고 고통스러운 거리에서 꾹꾹 눌러온 서러움을 이기지 못해 닥치는 대로 그악을 떨고, 신을 향해 악다구니를 써본 적이 있다면, 가로등 빛에 어스름 형체가 잡히는 눈송이가 "바람에 자기를 전부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옹골차게 견디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타라, 타라, 타라, 타라......"라는 음성을 듣고 있는 이 여인을 모른 척 홀로 두고 그렇게 돌아서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글을 이성으로 분해하지 못할 것이다. 

완전무결한 플로리스등급의 다이아몬드를 찾아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 그녀는 서서히 잠에서 깨어 삶의 현실감을 되찾아간다. 그러나 앞으로 성급하게 나아가지 아니하고, 기억의 재구성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삶의 뿌리에서부터 아직 정답을 알 수 없는 삶의 현재로 훑어 올라온다.

조정은의 수필 <그것을 타라>를 읽고 나는 그녀를 흉내내고 싶어졌다.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내 안에 있었으나 표현할 줄 몰라서 잃어버린 그 생각의 조각을 그녀에게서 찾았다. 내 마음이 여기에 있다. "전철을 타고 가다가 어제의 일을 떠올리면서 칠칠찮은 자신이 누추해져 속을 끓이느라 목적지를 놓치고 허둥대다가 지각을 한 날, 또 그런 자신이 마뜩찮아 하루 종일 일에 몰입하지 못하고 나는 왜 이럴까만 되뇌었다. 다신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지 자신을 다잡느라고 하루를 허비했다. 정작 소중한 순간은 몽땅 놓치는 줄도 모르고, 누가 왔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곤 했다. 어디 그런 날이 하루 이틀인가. 맨 날 반복되는 일상이 그 지경이다. 어느 한 순간 있는 그대로 다가오는 현상을 아무 조건 없이, 내 얄팍한 경험의 해석 없이, 그냥 받아들여 본 적이 있었던가. 언제 한 번 현재의 나를 있는 그대로 만난 적이 있던가"(84-85). 

하루 종일 시달리면서도 덜미를 잡지 못했던 생각의 꼬리, 누구에게든 털어놓고 도움을 받고 싶었던 문제의 실체, 내 안에 고여 있으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이리 저리 출렁거리는 감정의 파도, 그것을 대신하여 담아내준 그녀를 통해 나는 오랫만에 조금 숨을 쉬었다. 일기를 쓰려다 의미 없는 낙서만 하고, 편지를 쓰려다 하얀 백지처럼 머릿속이 하얘질 때,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다. 그녀가 걸어가는 그 생각의 길을 따라 걸으며, 나도 그녀의 말을 흉내내어 마음을 표현해내는 법을 배우고 싶다. 그녀처럼 내 마음을 열고 당신의 마음을 두드리고 싶어 옹알옹알 옹알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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