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내가 잊고 있던 단 한 사람
정채봉 지음 / 이미지앤노블(코리아하우스콘텐츠)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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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인생이여!


어떤 책은 읽을 때, 책 속에 내가 푹 잠기는 듯한 느낌을 주는 책이 있다.
내 마음 안에 책이 잠기는 것인지, 내가 책 안에 잠기는 것인지 모를 그 강렬한 느낌.
정채봉님의 <나 내가 잊고 있던 단 한 사람>, 이 책과 내가 서로 안에 그렇게 퐁당 잠긴다.

'나'라는 한 글자를 참 좋아했던 아버지를 기억하며,
정채봉의 따님이 "아버지가 남긴 글 중 오래도록 맑게 빛나는 글 몇 점을 가려 뽑은 것"이
바로 이 책, 정채봉 선집 <나 내가 잊고 있던 단 한 사람>이다.

시처럼 리듬이 있고, 곱고 맑은 소박한 언어로 쓰여진 이야기들이 어여뻐서 첫눈에 반했고, 
한 말씀 한 말씀이 지혜로워 깊이 호흡하며 읽었다.
지혜의 깊이가 깊으면서도 강요하지 않는 순한 글들이고,
언제고 반복해서 읽어도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소중한 가르침이 있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들은 '설교' 시간에 자주 듣던 말씀이여서 어리둥절 하기도 했다.
출처가 있는 유명한 예화는 제외하고, 출처가 없는 것 중에도 꽤나 유명한 글이 많다.
회자 되는 이야기를 모아 들려주신 것일까? 직접 지으신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느끼며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다 보면, 
느닷없이 '11월에'라는 글과 만나게 된다.
고운 이야기들 속에 조용히 스며들어 있는 정채봉님 자신의 이야기.
어느 날 갑자기 몸에 이상 징후를 감지하고 병원을 찾는 선생님의 불안한 이야기.
CT 촬영을 해보자는 의사의 말에 딸 '리태'를 불러 데이트를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
"리태야, 아빠하고 헤어져도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지?"(73)
내 가슴에 덜컥 내려 앉는다.

그리고 입원을 하고, 아빠는 수술실을 향하고, 딸은 슬리퍼 두 짝을 들고 아빠를 따르고,
희미한 정신과 또렷하게 들리는 말소리, 중환자실, 마우스피스, 무서운 꿈,
다시 얻은 한 살, 진통제 주사, 병실, 책을 읽어주는 딸과 나누는 대화.

"아빠, 오늘이 일요일인데 생각나?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나랑 같이 목욕 가고,
백화점 식품부에 가서 이것저것 일주일치 먹을 것을 한 아름씩 사왔잖아.
그리고 점심에는 회에 맥주 마시고 아빠는 흔들의자에, 
나는 소파에 앉아서 음악을 들으며 꾸벅꾸벅 졸던 것 말이야.
그때가 행복한 시절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나도 알겠어."
나는 주스를 마시며 대꾸했다. 
"언젠가는 또 이런 말을 할 때도 있을걸. 밖에는 눈보가 치는데 
따뜻한 병실에 앉아서 아빠한테 책 읽어 주다 말고 지루해서 하품하고 
오렌지 주스 마시던 그때가 행복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노라고 말이야."(91)


내 마음은 생각을 멈추고, 표현하기 어려운 빛나는 눈물로 가득찬다.
명치 끝이 아프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보다.

다시 이어지는 어여쁘고 지혜로운 이야기들.
그런데 선생님이 "엄마......"를 부른다.
일찍 돌아가시어 기억에 없는 엄마를...
정채봉 선생님을 키워주신 할머니, 할머니의 삶, 
단숨에 숨 한번 거두어 버리면 말 것을 군대 간 손자의 얼굴 한번 더 보고 가시겠다고
큰 고통을 며칠이나 더 참고 견디다 가신 할머니.
그리고 네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신, '나를 버린' 아버지. 
자식의 학비 타령도 외면하신, '아버지, 당신 두고 보자'를 되뇌이게 했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처음으로 면회를 오셨는데 철책으로 근무로 가버린 아들.
일본에서 삶을 마치신 아버지를 10년 간 외면하다, 그 유해를 고향으로 모셔오던 날.
맨 마지막 이야기 '한 인디언 추장의 메시지'까지.
책을 다 읽고도 나는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어른들에게 잃어버린 동심을 찾아주는 데 힘쓰던 2001년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맑은 영혼을 간직한 채 하늘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까지,
너무 아름다워서 시리도록 눈부시고 슬프다.

정채봉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귀하고 귀한 지혜는 생명의 환희, 인생의 아름다움이다.
한순간도 정성껏 살라 하시는 듯 하다.
"힘내시기 바랍니다" (19), 하시는 이 소박하고 청량한 한마디가 어찌나 정다운지 
눈물이 핑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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