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재발견 - 세계사를 뒤흔든
김도균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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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파괴를 통한 재건, 싸워서 지켜지는 평화, 죽음으로 지켜야 하는 생명!


’전쟁’은 무조건 나쁜 것, 악한 것,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것이라는 1차원적인 사고로 충만했던 내가, 전쟁에 대한 약간의 호감(?)을 갖게 된 것은 신일숙 작가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라는 만화 때문이다. 주인공 중의 하나로 전쟁과 파멸의 신 ’에일레스’가 등장하는데 잘 생긴 얼굴에 긴 머리카락을 나부끼는 폼새가 여간 멋진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 전쟁의 신에게 빠져 들었던 이유는, 파괴의 본능을 가지고 있는 전쟁의 신 에일레스가 운명의 상대인 한 여인을 향해 지고지순한 사랑을 한다는 설정 때문이었다.

전쟁의 신과 사랑. 전쟁과 평화가 한 몸인 것처럼, 전쟁과 사랑도 한 몸이라는 생각을 이때부터 했던 것 같다. 성경에서 "사랑(아가페)의 하나님"으로 정의되는 하나님도 구약성경에 보면 전쟁의 신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자신의 백성을 대신하여 싸우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신학적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전쟁을 ’여호와(야웨)의 전쟁’이라 명명한다. 사랑의 하나님과 전쟁의 신 하나님,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니인가? 그래서 나는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에 전쟁에 대해 좀 더 다차원적인 시각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매릴린 옐롬이 쓴 <아내(순종 혹은 반항의 역사)>라는 책을 통해서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이 땅의 ’아내 역사’에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 오는 예기치 못한 기회가 되었다는 분석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여성의 고용, 특히 기혼 여성의 고용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킨 촉매제였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미혼 여성 노동자보다 기혼 여성 노동자 수가 더 많아진 것이 이 때인데, 남성들이 군대로 차출되어 공석이 된 자리를 채우고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인력으로 기혼 여성이 동원된 것이다. 대공황 때는 일하는 아내가 ’남자의 직업을 뺏는다’는 이유로 공공연한 비난의 대상었지만, 전쟁 때에는 노동력 부족으로 일하는 아내가 칭송되었다. 이후로도 전쟁은 여성의 고용 형태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는데, 전쟁 전에는 미혼의 젊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독점했으나, 전후에는 태반이 기혼자와 중년 여성 차지였다. 이밖에도 이혼율, 육아, 가사노동, 자아정체감 등 전쟁이 여성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고도 다양하다.

내가 <세계사를 뒤흔든 전쟁의 재발견>에서 기대한 것도 이런 종류의 새로운 시각이었다. 이 책을 쓴 김도균은 전쟁사 중에서도 유럽 근대 전쟁사에 관심이 많은 국내 몇 안 되는 군사 전문 저널리스트라고 한다. 다양한 활동으로 군사와 전쟁 정보를 대중과 교감하고 있다는 작가의 전쟁 이야기는 말 그대로 전쟁 이야기이다. 책의 내용으로 볼 때, 그의 이야기는 "전쟁의 재발견"이라기보다 "전쟁, 그 숨겨진 뒷이야기"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가 들려주는 전쟁사의 초점은 스스로 밝히듯이 "전쟁 영웅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전쟁은 그것을 통해 이름 없이 스러져간 무수한 ’장삼이사’들이 미래 시대에게 남긴 유산 같은 것이다"라는 말 속에 있다. "우리가 아는 거시적인 역사에서 벗어나 당대를 산, 당대 전쟁의 이면에서 전쟁과 씨줄 날줄로 엮인 평범한 사람들의 에피소드를 들려줌으로써 전쟁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한 부분임을 보여주려 했다"(들어가는 말 중에서).

또 하나 전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은 "전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변화를 후대에 남겼다. 정체,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를 통틀어 지나간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은 분야는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은 총 4장으로 "전쟁을 구성하는 요소라 할 수 있는 군대, 무기, 전투, 군가의 재발견을 통해 전쟁 일상이 세계사의 큰 흐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폈다."

내가 가장 재밌게 읽은 파트는 1장 "세계사를 뒤흔든 천재적 조직술"(군대의 재발견)이다.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 군대, 전쟁에조차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없신 여겼던 흑인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조직된 미국 최초의 흑인 부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일본과의 전쟁을 통해 애국심을 증명해야 했던 일본계 2세로 편성된 미군의 442연대, 그리고 절대 살아돌아와서는 안 되는 사형수들로 구성된 소련의 죄수 부대(형벌 대대) 등. 약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환경에서도 참 쓸쓸한 일이다.

2장 "인류의 문명을 비약시킨 천재적 기술"(무기의 재발견), 3장 "극한의 상황에서 꽃피운 천재적 리더십"(전투의 재발견), 4장 "인간을 극한으로 몰고 간 천재적 심리술"(군가의 재발견)도 술술 재밌게 읽을 수 있다(전쟁 이야기를 재밌게 읽는다는 것이 왠지 좀 걸리기는 하지만).

싸우다 보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목적과 명분과 가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광기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무기와 군가의 발전을, 발전으로 보아야 하는지 광기로 보아야 하는지 심히 고민스럽다. 전쟁은 모순과 이중성의 모체인가? 파괴와 재건, 싸워서 지켜지는 평화, 죽음으로 지켜야 하는 생명! 우수한 두뇌와 막대한 자금과 건장한 청춘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하면 더 잘 죽일까, 어떻게 하면 더 빨리 완전하게 파괴할까를 위해 전력한다는 것도 슬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맞서 싸워야 하는 세력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그 실체가 무엇인지 그 진실을 모두가 알기 전에는 진정한 전쟁도, 진정한 승자도 없다고 생각한다.

2장 무기의 재발견에서 읽은 "잔혹한 무기의 등장"이라는 소제목을 가진 에피소드가 마음에 깊은 잔상을 남긴다. "1915년 4월 22일, 독일군이 대치하던 프랑스군에 역사상 처음으로 독가스를 살포했다. 노란 안개가 프랑스군 진지에 도달한 순간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파인애플과 후추를 섞은 것 같은 냄새를 맡은 프랑스 군인들이 곧 폐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공포를 이기지 못한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참호 밖으로 뛰어나와 무작정 후방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노란 안개는 연막탄이 아니라 염소였다"(114-115).

이 잔혹한 무기는 전쟁용 독가스 개발을 주도한 천재 과학자 프리츠 하버의 작품이다. 그런데 역시 유능한 화학자인 부인 클라라 하버는 독가스를 만드는 남편의 행동에 큰 고통을 받으며, 독가스 개발에서 손을 뗄 것을 여러 차례 부탁한다. 그러나 끝내 하버는 아내의 부탁을 저버리고, 1915년 5월 2일 남편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클라라는 권총 자살을 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 (로마의 전략가 베제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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