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1분이 걸리고
그와 사귀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120).

장영희 교수님을 잊으려면 평생이면 될까요?

"리브도, 윤이도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진짜 수퍼맨'이 되기 위해서, 
내 가족들, 내 학생들, 그리고 내 독자들의 '잘 싸워 주리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했던 용감한 싸움을 계속한다"(147).


교수님, 이 글을 읽는 지금은 
"다시 일어나 걷겠다던 수퍼맨 크리스토퍼 리브도, 
장애인 관련 법률을 공부해서 장애인들을 돕겠다고 했던 교수님의 친구 윤이도, 
그리고 "용감한 싸움을 계속했던" 교수님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올해는 잊어버리는 데 일생이 걸릴 분들이 유난히 우리 곁을 많이 떠나고 계셔
온 국민이 아파하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수님은 충분히 열심히 그리고 용감하게 싸우셨습니다.
교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희망과 기적을 기억하겠습니다.
교수님이 아버지에게 했던 그 인사를, 저도 교수님께 하고 싶습니다.

"내일 뵈어요, 교수님."(49-53)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장영희 교수님의 일기장 같기도 하고,
제자에게 보내주는 고운 편지 같기도 하다.
장영희 교수님의 글은 쓸데 없이 어려운 용어도 없고,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비범한 단어도 없다.
그래서 글을 읽으며 주눅들 일도 없고, 머리를 싸매야 하는 일도 없다.
교수님의 이야기는 일상적인 대화체이다.
누가 읽어도 공감할 수 있고, 누가 읽어도 행복할 수 있고, 
누가 읽어도 지혜를 배울 수 있는 바로 그런 글이다.

마감일을 넘긴 논문을 끝내기 위해 전전긍긍하다
폭발 직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이 책을 펼쳐 들었다.
교수님의 첫 이야기에서 나는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2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논문을 완성했는데,
그것을 도둑 맞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며칠을 넋이 나간 채 그대로 침대에 누워지낸 교수님은
다시 일어나 그로부터 정확히 1년 후에 다시 논문을 끝냈다고 하셨다.
교수님은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아"라고 내게 말해주시는 것 같다.
"괜찮아"(129-132).

내가 장영희 교수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미국 장애인들의 귀감이 된 동양에서 온 어느 장애인 여교수의 투쟁'(26-30)이라는
바로 그 사건을 통해서이다.
아파트 건물에 하나밖에 없는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7층 꼭대기에 살며 3주일간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교수님은
부동산 회사에 다른 아파트로 옮겨 달라고 건의를 했고,
이를 거절한 부동산 회사와 싸움을 해서 이긴 일로 매스컴이 떠들썩 했기 때문이다.
나는 굉장히 투쟁적이고 여전사 같은 날카롭고 냉정한 모습의 교수님을 상상했으나,
내가 처음 본 교수님의 화사한 웃음은 천진한 어린아이의 얼굴, 그것이었다.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미루다 겨우 겨우 마무리를 하는 일이 다반사고,
약속 시간에 늦는 일은 이미 정평이 나있고,
무위의 재능, 즉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만은 넘치게 가졌다는 장영희 교수님,
그 소탈하고 느슨한 마음과 삶의 이야기가 
우리 마음에 희망의 흔적이 되고, 사랑의 흔적이 되고, 기적의 흔적을 남긴다.

"그날 밤 문득 잠을 깼다. (...)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에 천장의 흐릿한  얼룩이 보였다.
비가 샌 자국인가보다.
그런데 문득 그 얼룩이 미치도록 정겨웠다"(234).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내가 미치도록 버리고 싶은 일상을 미치도록 정겨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살아가라고,
그렇게 힘차게 외치는 장영희 교수님,
교수님은 내게 너무도 "좋은"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다.

일생 동안 추억할 수 있는 책 한 권, 우리에게 남겨주어 감사합니다.
"내일 뵈어요, 교수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