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가는 대로
수산나 타마로 지음, 최정화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네 마음이 말을 할 때, 그때 일어나 마음 가는 대로 가거라.

유행처럼 번지는 현대인의 우울은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품어온 실존적인 고독이 아니라, 병리적인 외로움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외로움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병리적인 현상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수산나 타마로의 <마음 가는 대로>에서 한 가지 단서를 찾는다면 이것이 아닐까 한다. "마음이라는 말이 구식으로 들리는 반면, 이성이라는 말은 아주 현대적으로 들리지. 요즘 시대에 자기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다간 동물적이고 충동적인 사람 취급을 받지. 반대로 이성을 따라 살면 고상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게 진실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면 어쩌지? 지나친 이성이 결국 우리 삶을 갉아먹는다면?"(105). 수천 년 동안 문학은 영혼에 대해 이야기해왔지만, 영혼은 우리의 마음과 함께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유실물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고 했다. 사람 사이에 있는 섬,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서로의 마음에 닿으려 하지 않고 이성으로만 다가가려 하고 있다. 부부 사이에서도,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연인 사이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정보와 사실만을 주고받으며 논리와 판단과 분석과 주장과 설득으로 가득찬 이성적인 대화뿐이다. 내면의 대화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친밀성은 낯선 감정이 되어버리고, 밖으로 향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움츠려 드는 마음의 목소리는 익명성을 담보로 하는 가상 공간 안에서 낯선 상대를 대상으로 뱉어질 뿐이다. 결국 우리의 내면은 빈곤해지고, 친밀해야 할 관계에서 느껴지는 극단적인 단절은 병리적 외로움으로 우리를 몰아간다. "간소화되고 표피적인 의사소통 방법이야말로 우리의 내면을 빈곤하게 하고 인간적인 성장을 더디게 하는 것 같다"(5).

<마음 가는 대로>는 팔순의 할머니가 손녀에게 남기는 15통의 편지이다. 이 편지는 부치기 위해 쓰는 편지가 아니라, 남기기 위해 쓰는 편지이다. 손녀는 냉정하게 떠났고 팔순의 할머니는 몸에 이상 신호가 찾아왔다. 할머니는 자신이 죽고 없는 집에 어떤 이유로든 다시 오게 될 손녀를 생각하며 손녀가 쓰던 연습장에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편지를 쓰는 할머니는 손녀의 마음에 가 닿기를 원하고, 손녀가 자신의 마음에 와 닿아주기를 바란다. 손녀와의 추억을 더듬어나가던 할머니는 언제부터인가 마음을 닫아버린 손녀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준다. 왜 손녀에게는 아버지가 없는지, 왜 손녀의 엄마이자 할머니의 딸은 그렇게 슬픈 죽음을 맞았는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할머니는 자신의 어린시절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손녀에게 영향을 끼친 엄마의 인생은 다시 할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고, 딸에게 영향을 끼친 할머니의 인생은 또한 그 부모님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한때 어린 소녀였고, 딸이었고, 아름다운 아가씨였고, 불행했던 아내였고, 사랑하는 연인이었던 할머니의 추억 속에는 한 여인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생애와 더불어 가족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인간은 인류를 사랑하기는 쉬워도 가족 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왜냐하면 가족은 나에게 직접적으로 상처를 주고 영향을 끼치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마음 가는 대로>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의 한 여인의 삶이 다른 가족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내 삶의 원인과 근원의 뿌리가 엄마와 할머니라는 세대의 소통을 통해 찾아진다.

할머니는 손녀에게 인디언 속담을 들려준다. "그 사람이 신발을 신고 세 달을 걸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196).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오랫동안 아주 깊게 살펴봐야만 그의 행동 방식, 동기, 감정 같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런 이해는 많이 안다는 자만심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겸손에서 나오는 거라고 설명하며 말이다. 할머니는 편지를 읽는 손녀가 할머니의 "신발"을 신어보기 원한다. 즉, 마음과 마음의 소통을 원하는 것이다. 

할머니는 자연과 일상을 비유로 어떤 지혜자의 잠언보다 더 깊은 교훈을 들려주는데, 내가 마음에 새겨놓은 것은 이것이다. "난 시간은 낭비해도 상관없다고, 인생은 달리가 경주가 아니라 활쏘기 게임 같은 거라고 대답해 주었지. 중요한 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과녁의 중앙을 맞힐 수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35-36).

<마음 가는 대로>를 읽으며 생각한다. 내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한 여인으로서 엄마의 삶을. 그리고 한 남자로서 아빠의 삶을. <마음 가는 대로>가 내게 가르쳐 준 마음은 타인의 생을 바라보는 "연민"이다. 지금 이 마음, 이 기분이라면 누구와도 화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 가는 대로>를 읽으며 또 생각한다. 이제 이성보다 마음의 소리에 귀를 더 기울여보자고. 할머니는 말한다.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모를 때, 네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네 마음이 말을 할 때, 그때 일어나 마음 가는 대로 가거라." 옳다 그르다를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동안 이성으로 마음의 소리를 억압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다른 사람의 마음의 소리까지 이성으로 판단하며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일에 소홀했는지 모르겠다. 내 마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마음 가는 대로>는 인용하고 싶은 구절이 많은 아름답고 지혜롭고 또 슬프고 마음 아픈 그런 편지이다. 할머니가 된 한 여인의 추억이 하도 생생하여 도저히 소설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사실적인 이야기로 읽힐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