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시에 산다 비온후 도시이야기 2
박훈하 글, 이인미 사진 / 비온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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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부산 이야기가 아니다. 
글을 쓰신 분은 "무게와 깊이가 부족하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시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부산을 돌아보고, 사진을 구경하며 놀다와야지 했던 단순한 호기심을, 
’머리글’부터가 막아선다. 
나른한 봄날 같은 사고의 게으름에 찬 우물을 한 바가지 부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든다.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삶이 가벼워진다는 것은, 
대중의 삶이 영위되는 이 도시가 더 이상 대중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작동한다는 뜻이고, 
그 변화의 과정으로부터 그들이 소외되어 있다는 뜻이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이 낮은 대중의 지위는 그리 낯설지 않지만, 
현재의 이 소외 현상은 지난 시절의 억압적 체제에서 강요된 것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예전과 다르게 지금 대중들의 소외를 유발하는 건 정치적 억압이 아니라 
지극히 문화적 요인에 의한 것이다." (머리글 중에서)

그러니까 도시가 대중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작동하고 있고,
그 변화의 과정에 대중은 소외되어 있는데,
그 원인이 문화적인 요인이라는 것이다.
뭔가 시작부터 무겁게 다가오는 문제의식이 후덥지근한 여름 공기 같이 숨막히게 한다.

이 책의 방법론과 분석틀은 ’민속지학’(ethnics) 혹은 ’지역학’이다. 
이는 "시선을 멀리 두지 않고 우리 주위의 일상적 사건들과 
작은 이야기들로 사유를 시작하는 방법"이라고 소개된다.
일상적 사건들과 작은 이야기들로 사유를 시작하는 방법이라고 해서 안심하면 안 된다.
그 쉬운 소재가 오히려 너무 익숙한 것이여서
그 안에 숨은 문제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위의 일상적 사건들과 작은 이야기들로 시작된 사유를 통해 
도달하려고 하는 목표점은 여기이다.
 "국가의 인류 혹은 세계화 같은 거대서사의 허구성과, 
일상적 현실을 감쪽같이 은닉해 버리는 도시의 작위적인 스펙터클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객관적 거리를 생성, 새로운 인식지점을 제공해준다. 
그로써 도시 대중들은 자신과 세계 사이에 첩첩이 가로놓인 모순율과, 
그것들이 유발하는 인식적 오류를 얼마간 피해 갈 길을 발견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도시에 산다]는 바로 이 어마어마한 이론에 기대어 있다.
이 출발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흑백 사진에 담긴 사진의 초점과 과장된 벽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창과 그 창의 크기만큼만 보여지는 세상,
신축 빌딩과 판자로 지어진 낡은 가게의 대비가 보여주는 사진의 진실,
즉 급속한 근대화로부터 탈근대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부산이라는 도시의 지위를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글을 쓰신 분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과 가까이 맞닿아 있지만,
어쩐지 머리와 마음에 ’쥐’가 난다.
너무 아름다워서 슬픈 이중 감정처럼,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서정적인 글 안에 담긴 문제의식들은 
고단한 현실을 드러내고, 불안한 미래를 예감하게 한다.
’부산’은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총망라 하여 축소해놓은 ’모델 도시’ 같다.
갑자기 ’부산’ 거리에서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기분이다.

책에 실린 사진은 글과 종속적 관계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도시를 바라보는 글과 사진의 시선 일치는 
두 예술이 같은 지점을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산을 담은 흑백 사진은 예술적 심미와 고발이라는 이중의 목적을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사진의 의도된 초점은 보여주고자 하는 진실이 있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나는 사진을 통해 부산이라는 거대도시에 공존하고 있는 서로 다른 것의 ’썩임’ 을 본다.
흑백 안의 빛과 그림자는 일종의 대비를 이루며, 부산의 명암을 포착한다.
과거와 현재, 파괴와 구축이 큰 축을 이루는 가운데
성장과 불균등, 헤쳐지는 자연과 세워지는 건물들이 대비를 이루고,
그 안에 가끔 등장하는 인물들은 배경을 ’겉돌고 있다.’
(탈근대화되지 못한 근대인들의 부적응과 혼란이라고 표현해도 괜찮을까요, 작가님?)

[나는 도시에 산다]는 한 번 읽고 지나갈 책이 아니다.
부산을 구경하며 가볍게 놀다 오려다가,
얼떨결에 공부를 열심히 한 후 숙제를 잔뜩 떠안고 돌아온 기분이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을 대상화하여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며 돌아보는 일,
그리하여 나의 삶에 작동하는 지배 원리의 실체를 파악해내고,
내 삶이 나의 의도를 벗어나 도시 안에 그대로 매몰되지 않도록 재구성해내는 작업을
이 예쁜 책이 도와준다.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교양도서"의 수준을 확인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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