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의 개 - 삶과 죽음의 뫼비우스의 띠
후지와라 신야 지음, 김욱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제목뿐만 아니라, 표지의 느낌까지도 음침하기 그지없는 이 책을 읽기로 선택한 것은 저자 ’후지와라 신야’에 대한 자자한 명성 때문이었다. 무엇 때문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에게 열광하는지 알고 싶었다.

처음 접하는 ’후지와라 산야’의 글을 읽으며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문체이다. 그의 글은 쉽다! 그는 횡으로, 종으로 예리하게 도려내 듯 시대의 단면을 날카롭게 읽어낸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지식이나 사상을 자랑하려는 허영이 전혀 없다. 현란한 묘사를 남발하지도 않는다. 단순한 문장과 단어의 적확성이 그의 예민한 통찰력을 더욱 빛나게 해준다. 과장이나 꾸밈이 없는 그의 문체는 그의 지식이 아니라, 사람됨과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터넷 서점에서 확인하니 [황천의 개]는 여행과 기행으로 분류되고 있다. 내가 읽기에 이 책은 칼럼과 에세이(특수한 주제에 관한 논설) 같은 성격도 강하다. 그의 여행은 유희가 목적이 아니다. 그의 기록은 주관적인 깨달음과 감상을 넘어, 사건과 사람과 세대와 시대를 분석하고 추적하는 삶의 긴 여정이다.

[황천의 개], 나는 그가 추적하는 소재에 당황한다. 그가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관찰하고, 추적하는 대상은 ’옴진리교’ 라는 일본의 신흥종교이다. 인도의 힌두교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하며, 현세에의 절대 부정을 추구하는 ’옴진리교’는 청년들이 조직한 신흥종교이다. 그런데 1995년, 이 사이비 종교의 신도들이 도쿄 시내의 전동차 다섯 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사린 가스 테러를 감행하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진다. 

후지와라 신야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잡지인 <주간 플레이보이>를 선택하여 1년간 이 ’옴진교’에 관한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주간 플레이보이> 1995년 7월 18일호부터 1996년 5월 28일호까지 ’세기말 항해록’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글을 모은 것이다. 그가 이 잡지를 선택한 이유는, "옴진리교의 젊은 신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젊은이들의 여행이 점차 나약해지고, 쉽사리 신앙 등에 빠지는 위험을 지적하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그의 글은 젊은이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책 속에서 그는 실제, 삶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한 젊은이와 만난다. 풍경과 햇살이 좋은 창가 자리를 주로 찾아 앉았던 젊은 날의 자신과는 달리, 창가 자리를 두고도 어두운 자리에 앉아있는 한 젊은이를 보고 그가 읽어낸 것은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외부라든가 풍경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창밖이란 외부이며, 타자이며, 사회이며, 풍경이며,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자연이다. 그는 "미디어를 통해 가상 환경에 생존을 의지해온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은 그 시작부터 현실과 자연으로부터 단절되었다"고 본다(p .99). 외부 세계는 그들에게 돌아갈 고향이 아니다. 젊은 세대들도 외형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바다, 혹은 산을 찾지만, 그것은 삶의 터전이 아닌 일시적인 유희의 대상임을 짚어낸다. 불현듯 요즘 젊은이들은 월급보다 더 많은 휴가를 원한다는 통계자료가 담고 있는 의미가 내 머릿속에서 해석되어진다.

"이처럼 외부 세계에 대한 단념이 오늘날의 젊은 세대가 인생을 살아가는 생존 양식이 되었다면 호텔 레스토랑에서 어두컴컴한 테이블을 선택하는 것은 그들이 보여주는 그들만의 생존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p. 100)

후지와라 신야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가장 오래도록 머물러 서 있었던 지점은, 인도 여행에서 체험한 ’시체 태우는 장면’에서이다. 나는 그 느낌을 축약하여 전달할 자신이 없어, 여기에 그대로 인용해본다.
"처음 그 광경을 봤을 때는 정말 이렇게 해도 상관없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어.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보여줘도 괜찮다는 건가, 하고. 그때까지 내가 자라난 일본에서는 인간이 좀 더 귀한 대접을 받아왔다고. 인간의 목숨은 지구보다 무겁다는 말을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 목숨을 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간의 목숨이 최우선이라는 과대평가 때문에 과보호와 에고이즘이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얼마나 나약하게 만든 것인지 우리는 알고 있잖아.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과 시체를 금기로 여기고 철저히 은폐해왔지. 어리석은 선택이었어. (...) 우리는 지나치게 목숨을 과대평가했고, 죽음이 우리 곁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믿어왔지. 그 믿음이 살아 있다는 존재감을 희석시킨 주범이었어. 부모의 기대와 과보호에 노출된 아이들이 커갈수록 자신의 소중함을 증명하려고 초조해하듯,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살아 있다는 진실 앞에서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게 된 거야."(p. 132)

살아 있다는 진실 앞에서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게 된 거라는 그의 설명처럼, 그래, 나도 그랬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자꾸 초조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자꾸 초조해진다. 그것이 내가 가끔 불면의 밤을 보내는 이유이다. 후지와라 신야는 사회가 발전할수록 이 같은 경향은 확대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초조함 때문에 인도로 갔다고 한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출산율이 감소되면서 부모와 사회는 하나뿐인 자식을 과잉된 기대와 과보호 속에서 키우고 있는데 인간은 우리가 그토록 많은 기대와 희망을 걸 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냐. 동물이나 곤충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거야." (p. 144)

후지와라 신야는 점점 더 가상화되는 현실 속에서 젊은 청년들은 자신의 신체 감각을 조금씩 상실하고 있다고 말한다. 요즘 우리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리얼리티에 의해 잠식 당하고 있는데, 그는 TV가 보여주는 리얼리티는 진정한 리얼리티가 아니라, 현실을 반쯤 픽션화시킨 가상 리얼티라고 설명한다. 갑자기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스며들며 섬뜩해진다.

실제와 가상의 모호한 경계에서 내가 삶을 사는지, 시간이 나를 좀먹고 있는지 정신이 차려지지 않는다. 출근 길에 창 밖으로 보았던 목련꽃에 오늘 나는 슬퍼졌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씨름하는 나의 반복되는 일상이 갑갑하게 조여오며, 문득 깨달아지는 진실은 이 좁은 사무실 공간 안에서 내 젊은 날이 다 가고 있다는 것이다. 

"외관만 기능하는 도시 문명의 인간들로부터 공감을 얻어내려면 허망한 연기를 계속해야 하는 법"이라고 했던 후지와라 신야의 통찰처럼, 인간 조직 안에서 마음을 속이며 웃고,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통제하며 허망한 연기를 계속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상과 신념과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후지와라 신야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여행이 점차 나약해지고 있고, 쉽사리 신앙에 빠지는 위험을 지적하고자 이 글을 썼다고 하는데,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과대망상에 가까운 정신 행동이지 신념이나 신앙이 아니다. 우리는 저마다 무엇인가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 지위를 믿기도 하고, 지식을 믿기도 하고, 돈을 믿기도 하고, ’너’를 믿기도 하고, ’나’를 믿기도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은 내가 존재하는 목적에 대한 신념이다. 이제는 때때로 나를 괴롭히는 초조함과 결판을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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