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책들과의 만남 (양장본)
데이비드 덴비 지음, 김번.문병훈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인생은 짧고 읽어야 할 책은 많다. 무엇을 읽을 것인가? 아니, 그전에 ’읽어야 할 책’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가져본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은 읽어야 할 책이 있다고 말한다. ’고전 때문에 고전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는데,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은 다른 말로 바로 [고전과의 만남]이다. 근대와 현대를 지나, ’급변’이라는 말조차도 무색한 세상에서 변화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우리는 매일 적응하기도 급급한데, 매일 신간과 함께 쏟아져나오는 낯선 이론을 섭렵하기도 어려운데, 고전 읽기는 여전히 유효한가, 유효하다면 어째서 그러한가를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아마도, 찬반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예전에 내가 속한 조직에서 정규교육과정을 신설하는데, 커리큘럼을 구성하는 기획회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회의 과정에서 기본 방침에 의견차가 생겨 자연스럽게 두 그룹으로 나눠지면서 논쟁이 붙었다. 한쪽 그룹은 이론과 기초가 되는 학습에 주안점을 두어 철학과 고전어 등과 같은 수업을 개설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대편 그룹은 현장에서 바로 활용 가능한 실용적인 수업을 더 많이 개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었다. 나는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을 읽으며, 이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은 듯 하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의 저자 데이비드 덴비는 영화 평론가이자 저술가로 활동하다가 왜 마흔여덟의 나이에 다시 고전읽기 수업을 청강하게 되었는지 책의 머리말에서 아주 길게 설명한다. 그중에서 나의 뒤통수를 한대 후려치는 듯한 그의 고백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미디어가 정보를 주었지만 1990년대의 정보란 덧없고 불안정한 것이 되어버렸다. 정보란 것은 일단 어디든 쓰이게 되면 금방 분해되어, 그 조각들 일부는 가치가 커지지만 나머지는 쓰레기통 속으로 버려진다. 그 누구의 정보도 안성맞춤일 수가 없는데, 그것이야말로 지금 미국인들이 불안과 안달로 반쯤 미쳐버린 듯 보이는 많은 이유 중 하나이다. (...) 금세기 말에, 아니 나아가 이번 천년의 말에 이르러 미디어가 문학의 영역을 통째로 점령하고 문학을 밀어내려 하는 상황에서, 내 역겨움에는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강렬한 감정들, 즉 향수, 회한, 분노, 심지어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정보를 얻는 것과 정신적 기반의 토대를 다지는 일은 비슷한 듯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결과물을 낳는 두뇌 활동인 것이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은 컬럼비아 대학 학부생들을 위해 개설된 교양필수과목인 <현대문명>과 <인문학과 문학>을 청강한 저자의 강의노트 같은 기록이다. 나에게 신선했던 충격은, 목차에 위대한 책의 제목들이 선별되어 기록되어 있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재밌게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제외한 나머지 목차는 모두 위대한 책을 저술한 인물의 이름이다. 위대한 책 한 권을 지정하지 않고, 위대한 책을 저술한 인물의 대표작을 읽으며 해석하고 토론하는 방식이다. 그들의 접근과 수업방식이 신선하다.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사람을 지정하여 그의 대표작을 읽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수업에 감탄했다. 그것이 바로 그 한 권의 책을 더욱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의 실마리를 찾아내며, 사고의 중심을 추적해갈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접근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전은 단순히 한 작품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쓴 사람과 그의 사상(이론)과 ’함께’ 읽는 것이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은 집필 방식에서 두 가지 큰 특징을 갖는다. 첫째는, 고전을 읽으면서 저자 자신의 두뇌 속에 일어나는 모든 사고의 과정을 그대로 옮겨놓듯 솔직하게 적어놓았다는 것이다. 고전을 읽고 있는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두 번째는, 컬럼비아 대학의 강의 현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생생한 현장감이다. 그들의 수업 중, 유독 나의 흥미를 끈 것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수업 시간이었다. 일단 그 두 권의 책(!)을 모두 정독했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이성을 초월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성서를 고전으로 분류했다는 것이 특이했고, 그것을 읽고 어떤 토론이 벌어질 것인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가끔 토론하는 모임에 참여하면, 자신의 문제를 객관화시키지 못하고 또 핵심적인 질문에서 빗나간 주제로 토론이 ’수다’의 수준에 머무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또한 어떤 책이든지 읽은 것을 정보로 처리해버리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다고 자랑하는데, 그의 인격과 삶에 그런 ’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읽은 것을 입(정보)으로밖에 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독서 그 자체가 사고의 힘을 길러주고, 인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좌절한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은 깊은 있는 책읽기와 함께 그것이 사고와 삶 속으로 스며드는 맛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준다.

도서목록을 보면, 그중에서 몇 권을 읽었는가를 세어보는 버릇을 가지고 있는 나는 [고전]도 그렇게 읽었다. 고전 목록을 하나씩 지워가며, 오로지 목록에 오른 책들을 다 읽는 것이 목표였다. 그때를 추억해보면, [좁은 문], [죄와 벌], [인간의 굴레] 등을 읽으면서 왜 이 책들을 훌륭하다고 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까지 나는 누가 고전을 얼마나 읽었는지 물어보면, 그것을 비밀로 했다. 내 사고의 힘과 인격의 깊이에서 티가 나지 않는 것이 민망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어봤다"고 말하는 것을 목표로 읽었던 고전을 다시 읽어야겠다. 이제야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생긴다.

글이 길어졌다. 방대한 분량을 읽는 동안 생각이 많아서였다고 변명하며,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이 더할 수 없이 즐거웠음을 고백하며 글을 맺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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