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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생각보다 맛있다 - 재미있고 유쾌하며 도발적인 그녀들의 안티에이징
김혜경 지음 / 글담출판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내가 지금까지 받은 모든 선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이 있다면,
바로 고등학교 때 친구가 선물해준 친구의 일기장이다.
그 친구는 1년 동안 꼬박 적은 일기장을 내밀며
자신의 삶의 일부를 내가 간직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게 기억해달라고 했다. 내 기억 속에 살아 있고 싶다고.
전쟁터 같은 세상으로 당당히 걸어나가기 위해 불면의 밤을 함께 보냈던 그 시절,
이제 막 영글어가는 자신의 내면 속에서 어떤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지,
친구는 그 소소한 일상과 고민과 열꽃을 고스란히 적어 내게 주었다.
나는 친구의 삶을 응원하며 언젠가 당당한 모습으로 다시 마주하기를 바랬다.
글담출판사에서 펴낸 [나이는 생각보다 맛있다]는 꼭 그 친구의 일기장을 다시 읽는 느낌이다.
그 격정을 이겨내고 이제는 전쟁터 같은 세상 속에서
유쾌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올곧게 걸어가며 행복한 노래를 부르는
자신만만한 친구를 다시 만난 듯한 착각이 든다.
간혹 "저 사람 멋지다!"라는 느낌이 들면, 친구가 되고 싶거나, 닮고 싶거나, 팬이 된다.
광고 만드는 일만 25년째 하고 있다는 마흔여덞의 김혜경 씨.
나에게는 ’선배’ 세대이지만, 그녀의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이렇게 살면서 나이 들면 정말 행복하겠구나, 하는 확신을 주는 사람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에게서 나는 전투적인 삶의 냄새가 그녀에게서도 난다.
그러나 오직 ’일’에 성공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며 올인한 흔적은 없다.
치열하면서도 여유롭고,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고, 몰두하면서도 즐긴 흔적들이 가득하다.
한마디로 열정과 낭만이 가득한 삶이다.
그녀가 부러운 이유는 사회적인 성공이나 화려함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삶을 즐기는 여유와 자신만의 삶에 방식에 대한 당당함 때문이다.
비록 변두리지만 재개봉관을 두 개나 운영하던 아버지(미성극장 사장)가
그녀의 이런 당당함과 여유로움의 뿌리가 되어주었을 것이라는 의심도 든다.
그러나 극장을 팔아 무리하게 관광호텔을 지었다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개미가 우글우글하는 시장통의 허름한 전세집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나는 오히려 그녀의 당당함과 여유로움이
어린 나이에 권력이 얼마나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달은 덕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늙음의 힘은 때론 무난한 삶을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이 드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그녀.
나쁜 것, 싫은 것, 무난한 것, 이런 것들을 포용해 주는 것이라고 나이 먹음의 미학을 노래하는
그녀의 여유는 젊은 한 철을 후회없이 흐드러지게 살아낸 후에 맺히는
열매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는 생각보다 맛있다]는 김혜경 씨 뿐 아니라,
김혜경 씨와 닮은꼴 친구 같은, 개성 뚜렷한 여덟 명의 여성 이야기가 더 들어있다.
"노래방을 간다. 낙서를 한다. 소리를 지른다. 지칠 때까지 쏘다닌다. 슬픈 영화를 본다.
뒷담화를 한다. 쇼핑을 한다. 잠을 잔다. 마구 먹는다. 인형을 팬다. 휴지를 찢는다.
인터넷에 흘러 다니는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나는 주로 지쳐 쓰러질 때까지 쏘다닌다. 하지만 이건 시간이 좀 있을 때의 방법이고,
시간도 없고 아이디어까지 급박한 시점이면 나는 과자를 산다.
씹히는 소리가 가능한 현란한 것으로.
아그작아그작 ...... 바스러지는 과자에 스트레스도 씹힌다."(p 237)
별난 교훈이나 특별한 이론은 없지만,
사뿐사뿐 경쾌하게 살아가는 친구의 일기장을 읽듯 잠시 쉬어갈 수 있고,
나만의 삶의 방식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주는 책이다.
성공한 여자에 대한 시기심보다, 나도 이렇게 멋지게 나이 들고 싶다는
희망차고 행복한 꿈을 꾸게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