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기독교 역사 - 악당인가 성자인가, 회복을 위해 마주해야 할 역사 속 기독교
존 딕슨 지음, 홍종락 옮김 / 두란노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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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교회사에 대해 지킬과 하이드 같은

상반된 두 얼굴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오히려 의연하게 고통을 견디는

겸손한 종의 얼굴과

의로움이라는 명분 아래 사회를 괴롭히려고 안달하는

도덕 경찰의 얼굴이다(95).

'여성학' 수업을 들었을 때의 일입니다. 여성 인권을 위해 일하는 분이 계셨는데, 제가 교회 안에서 일한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적대적으로 대하는지 몹시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분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가부장적인 여성 차별은,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인류가 타락했다고 가르치는 교회에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있다면), 이 세상에 만연한 '인간관'과 비교해볼 때, 예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것인지, 예수님의 제자들이 로마의 인간관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설명해보고 싶었지만, 입도 떼어보지 못했습니다. (외부 세계에 대한 악영향은 둘째치고) 교회의 조직 안에서조차 어떻게 여성 차별이 자행되어 왔는지 나름의 증거(?)를 끊임없이 제시하는 그분을 말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존 딕슨의 이 책, <벌거벗은 기독교 역사>를 함께 읽고, 제대로 된 토론을 해보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종교가 있든 없든, 선한 사람들은 선하게 행할 수 있고 악한 사람들은 악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선한 사람들이 악을 행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종교다(465).

코로나19 펜데믹 이후, '교회'를 사회악으로 비난하는 목소리가 공공연합니다. 악플러들의 주장처럼, 종교가 없으면 세상은 더 좋아질까요? <벌거벗은 기독교 역사>는 이 문제에 답하고자 2천 년간 교회가 걸어온 길을 추적합니다. 기독교가 인류에 기여한 부분도 크지만, 사실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답게 사는 데 꾸준히 실패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직시합니다. 역사 속에서 십자군 원정, 종교재판소, 노예제 옹호와 같은 끔찍한 일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음을 시인합니다. 이것은 분명 기독교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마 7:3-5)입니다. 그러나 공정한 평가를 하려면, 어두운 면을 가려서는 안 되겠지만, 어두운 면만 보아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름다운 곡을 썼는데 때로 교회는 그 곡을 잘 연주했고, 때로는 엉망으로 연주했다"(25).

존 딕슨의 <벌거벗은 기독교 역사>는 교회의 자기비판과 같은 책입니다. 그리고 그 솔직한 자기비판을 통해 '작품'(원곡)과 '연주'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존 딕슨은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어두운 측면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합니다. "예수님은 더없이 아름다운 작품을 작곡하셨는데, 기독교인들이 그 곡을 항상 잘 연주한 것은 아니었다"(63).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아름다운 작품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때도 있었고, 전혀 다른 곡으로 연주할 때도 분명 있었지만, 그 원 곡조를 제대로 연주할 때는 세상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교회는 그 설립 문서들에 담긴 이 두 멜로디 라인을 연주할 때

역사 속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였고,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82).

<벌거벗은 기독교 역사>는 그리스도의 가장 독특한 두 멜로디 라인을 짚어주는데, 하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존재로 생각하는 혁명을 가져온 장본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존 딕슨은 이 두 멜로디 라인이야말로 예수님이 세상에 남기신 특별한 유산이며,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숭고한 가르침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공정하게 역사를 해석하고자 한다면, 이것이 세상을 급진적으로 바꿔놓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이미 승리했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기독교인들은 훌륭한 패배자, 심지어 즐거운 패배자가 될 수 있었다(107).

<벌거벗은 기독교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슴 뜨거워지는 교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힘센 근육질의 기독교"가 아니라, "즐거운 패배자"가 되었을 때, 예수님이 남겨주신 아름다운 원곡을 원곡답게 연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고, 죽은 사람들의 시선을 묻어 주고, 자선 단체와 교육 기관과 병원을 세우고, 노예들을 해방시킬 수 있었던 것은, 힘센 근육질을 가졌을 때가 아니라, 기꺼이 훌륭한 패배자가 되기로 선택했을 때라는 것입니다. 그 뜨겁고 훌륭한 패배의 순간들을 통해 예수님의 아름다운 멜로디 라인은 세상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모든 개인의 평등성 개념을 도입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지만, 그 개념의 발전을 방해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73).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없이 아름다운 곡조를 지으셨다는 것만큼은 분명하지만, 기독교인들이 그 곡조를 잘 연주하지 못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특징이 '사랑'이라고 하셨는데, <벌거벗은 기독교 역사>는 그 특징이 증오와 편견과 폭력일 때가 많았다는 사실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문제는 기독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은 연주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곡조는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폭력은 인류사에서 보편적 요소였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독보적입니다. 인간에 대한 구분과 차별은 당연하게 여겨졌지만,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윤리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기독교 윤리야말로 인류 역사에 독보적인 자산임이 분명합니다. 만인에 대한 사랑과 평등 개념이 '예루살렘'에서 나온 것일 수밖에 없음을 안다면,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마가 4:2) 예언한 선지자의 노래에 절로 가슴이 뜨거워질 것입니다.

거룩한 교회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가?

<벌거벗은 기독교 역사>는 기독교 역사의 어두운 측면을 기꺼이 들여다보며 공정한 설명을 제시합니다. 교회 역사 속에 뒤얽힌 수치와 영광, 즉 교회가 보여준 최고의 모습과 최악의 모습을 동시에 다루며, 교회가 먼저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들여다보고 인정하도록 인도합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종교나, 비종교가 아니라, (잘못된 열정에 사로잡힌) 인간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해줍니다(471). 결국 우리 모두의 눈 속에 들보가 있음을 인정하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가 아니라,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에 초점을 맞출 때, 세상은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 있다면, 죄인이라는 사실에 겸손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으나,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에 우리의 자존감이 훼손되지 않는 것처럼, <벌거벗은 기독교 역사>는 예수님의 원곡를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는 교회의 부끄러운 실력에 애통할 수밖에 없으나, 교회가 가진 원곡의 독보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거룩한 교회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뜨거운 소망을 불어넣어줍니다.

존 딕슨의 <벌거벗은 기독교 역사>를 읽으며, 진정한 교양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를 믿은 안 믿든, 종교인이든 무신론자이든, 기독교 신앙의 옹호자이든 비판자이든, 인류가 정직하게 가르쳐야 할 역사요, 지식이라 확신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힘센 근육질의 권력을 거머쥐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패배자가 되기를 선택하는 길임을 아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자이든, 따르지 않는 자이든), 모두에게 가장 숭고한 지식이면서, 동시에 가장 위험한 지식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떨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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