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문열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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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년 개회기에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글공부를 좋아하여

열 살 전후에 사서삼경 독파 이십세 전에 장원급제했네

안동 김씨에 본명은 김병연 어머니를 모시고 아들 둘에 처 하나

중국의 이태백 일본의 바쇼 그렇다면 보여주자 대한민국 김삿갓

백일장 과거에서 조상을 욕한 죄로 하늘이 부끄러워 삿갓을 쓰고

이름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욕심도 버리고 양반 또한 버렸네

그후로 한평생 삿갓을 쓰고 삼천리 방방 떠돌아다니니

사람들은 그를 보고 김삿갓 김갓삿 삿갓이라 하네

삿갓 쓰고 죽장 짚어 바람 부는대로 구름처럼 떠돌며

착한 서민의 친구 되어 못된 양반 혼내 준 의리의 사나이

도인에는 도 시에는 시로 맞서 시 짓기 내기에 져 본 일이 없네

산첩첩 수중중 구경하고 동가식 서가숙 방랑하네

외롭고 고독한 방랑의 생활 술은 삿갓의 유일한 친구

한 잔 하면 시상이 떠올라 두 잔 하면 세상이 내 것이라

한 잔에 시 한 수 또 한 잔에 시 한 수 신선의 목소리 무아의 경지로다

천재로다 천재로다 김삿갓 김 삿갓 삿갓 삿갓 삿갓 삿갓

그의 삶에 있었던 진실은 다르다(79).

이문열의 <시인>은 '김삿갓'이라 불린 '김병연'의 삶과 작품을 재조명한 소설입니다. 그러나 소설을 읽는다기보다 평전이나, 혹은 마치 다큐멘터리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극적인 요소 안에서도 '진실'을 추적하는 작가의 매서운 눈빛이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인>은 한 번 손에 잡으면 쉽게 놓을 수 없는 스토리의 흡입력이 대단한 작품입니다. '이문열'이라는 이름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 작품이었습니다.

이문열의 <시인>을 읽고, 가수 홍서범 씨의 노래 '김삿갓'의 가사를 다시 찾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랩'이라고 평가되기도 하는 이 곡을 통해, '김삿갓'이라는 인물의 통상적인 설화를 처음으로 접했던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시인 '김삿갓'에 대한 통상적인 설화는, 김병연이라는 한 인물이 나이 스무 살에 백일장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의기양양해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가 그날 시제를 통해 추상 같이 죄를 물은 인물이 바로 자신의 할아버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하늘 아래 떳떳이 드러낼 수 없는 자신의 몸을 가리기 위해 삿갓을 쓰고 일평생을 방랑 시인으로 살았다는 것이었습니다(78-79). 그러나 작가 이문열의 <시인>은 "그의 삶에 있었던 진실은 다르다"고 폭로합니다. 불효가 부끄러워, 이름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욕심도 버리고, 양반 또한 버렸던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선비께서는 이 김병연의 지난 삶을 짐작이나 하실는지요? 역적의 자손이란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선비께서는 아까 사람이 문물 제도보다 앞이라 하셨지만, 그 문물 제도의 비호 밖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실 겁니다. 한 번 자신을 거역한 사람에 대해 제도가 얼마나 끈질기고 음험한 복수를 하는지를 잘 모르실 겝니다 …."(95)

이문열의 <시인>은 어쩌면 방랑 시인 '김삿갓'이 그 삿갓으로 진짜 가리고 싶었던 것은, 자식은 어버이의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는 가르침이 주는 죄의식이라기보다, 할아버지를 팔아서라도, 세상과 더러운 거래를 해서라도, '김익순의 손자'라는 주홍글씨, 역적의 자손이라는 그 굴레를 벗어던져 버리고 싶었던, 그 안에 숨은 검은 야망, 그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체제 이데올로기의 악의에 대해 저항하기보다, 다시 그 체제 속으로 편입하고 싶은 그 뜨거운 열망을 끝내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문물과 제도는 누구도 벗어던지기 어려운 차꼬와 칼이고, 우리 삶의 자잘하고 성가신 나날로 쌓아 올린 무덤이며, 자칫 떨고 주리게 되어 있는 우리 몸은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버텨 내기 힘겨운 짐이다. 하지만 시인은 바로 그러한 것들에서 벗어난 자다. 그 모든 것을 떨쳐 버린 뒤에야 시인이 난다"(149).

작가 이문열은 "모든 일탈자가 다 시인은 아니다. 그러나 시인은 반드시 모두가 일탈자다"(159)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시인으로 하여금 일탈을 꿈꾸게 하는 그 무엇이 결국 시인이 부르는 노래가 된다는 것입니다. 김병연이라는 한 인물도 그를 일탈로 몰아낸 그 차가운 현실이 아니었다면, '김삿갓'이라는 시인으로 태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역적의 자손이 모두 김삿갓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역적의 자손이라는 차꼬가 없었다면 우리는 김삿갓이라는 시인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벗어난 것처럼 보여도 결국 자신의 운명 안에 갇혀 있는 피조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인>을 읽으며, 인상적이었던 대목 중에 하나는, "사민의 평등과 공영을 외치는" 큰 도둑의 두령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쓸데없으면서도 세상의 물자를 축내는 목숨은 거두어야 한다고 호령하는 도둑의 두령은 김삿갓과 같은 시인이야말로 도둑이라고 일갈합니다. "어쨌든 너는 일하지 않고 먹고, 생산하지 않으면서도 쓰는 자다. 우리가 목숨을 앗으려 하는 것은 바로 너 같은 도둑이다."

큰 도둑의 이같은 일갈에 시인은 시의 효용을 항변합니다. "선생 같은 분에게 시 그 자체가 바로 생산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소. 그러나 꿈도 생산이 되고 기대도 생산이 될 수 있다면 시도 생산이 될 수 있을 것이오. 시도 꿈과 기대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오. 하지만 보다 나은 세상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훨씬 더 많은 것이 필요할지 모르겠소. 꿈과 기대 외에 다른 감정들도. 그런데 그 같은 감정의 생산에는 시도 유용한 도구일 수가 있소"(224).

경제적인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시를 잊어가고, 시를 잃어가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작가의 소리 없는 항변처럼 들립니다. 글쟁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도둑'으로 몰리는 일이 아주 없지는 않았으니까요. 작가 이문열은 <시인>이라는 작품이 "위장된 자서전 혹은 고백록이기도 하다"고 털어놓습니다. <시인>이라는 작품의 시발이 (알려진 사실과는 다르게) "젊은 날의 그(김삿갓)가 출세를 위해 권문세가에서 문객 노릇을 한 적이 있다"(10)는 것임을 감안할 때, 혹시 작가 '이문열'에게도 보이진 않지만 스스로 쓰고 있는 '삿갓'(죄의식)이라도 있는 것일까 하는 어떤 의심도 생깁니다. 그러니 여러 면에서 특히 작가 '이문열'의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들이라면 <시인>은 반드시 놓쳐서는 안 될,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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