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토 에디터스 컬렉션 10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문예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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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알겠다. 내가 언젠가 바닷가에서 그 돌멩이를 들고 있었을 때의 느낌이 분명히 생각난다. 그것은 일종의 달착지근한 욕지기였다. 얼마나 불쾌한 느낌이었던가! 그 느낌은 분명히 돌멩이로부터 왔다. 돌멩이에서 내 손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 그거였다. 바로 그거였다. 손안에 느껴지는 일종의 구토증이었다"(34-35).

'삶'에 대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처음 혐오감을 느꼈던 때를 기억합니다. 이제 막 열 일곱살이 되던 해였고, 고등학교 1학년 학생 신분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친구로 인해 '죽음'이라는 것을 난생 처음 생생하게 목격하게 됐고,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동갑이었던 담임선생님의 아들이 뇌출혈로 또다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세상 사람들 모두가 우리 가족에게 등을 돌리는 것 같은 때이기도 했습니다. 스스로는 '사춘기'의 시작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문제 하나에 울고 웃으며 오로지 시험 점수, 내신 성적, 대입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구는 친구들의 모습에 실증이 났고, 그래서 그들의 관심사, 그들의 대화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의 부도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은 아버지의 사업만 망한 것이 아니라, 내 인생까지 망하게 만든 것 같았고, 비루한 내 삶이 초라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때 '실존주의'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것 같고, 내게 실존주의란 허무주의의 다른 이름으로 각인되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세상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패배로 결정난 싸움이지만 살기 위해서는 절대 멈출 수 없는 지난한 싸움으로 비춰졌고, 자기 의지와 상관 없이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운명에 대한 깊은 애도로 느껴졌습니다. 그들의 이야기 중에 강한 호기심이 일었던 작품은 까뮈의 <이방인>, 그리고 사르트르의 <구토>였고, 깊은 깨달음을 주었던 이야기는 '시지포스 신화'였습니다.

이 중에서 사르트르의 <구토>는 줄거리도 모르면서, <구토>라는 강렬한 제목에 이끌렸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살기 위해 먹고, 아무 생각 없이 숨만 쉬는 나'라는 어느 노랫말처럼, 어떤 의욕도 느끼지 못하는 시간 속의 고통, 초라한 내 삶에 대한 거북함, 목표와 꿈을 강요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독한 혐오가 <구토>라는 한 단어로 모두 설명되는 것 같아, 제목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입니다.

"지금 나는 나고, 나는 여기에 있다"(132).

돌이켜 보면, 나를 가장 아찔하게 했던 것은, 나를 나라고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보며 이게 나구나 하는 인식, 그리고 지금 여기에 분명히 존재하는 '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그 낯설고 서늘한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 번씩 그렇게 도대체 지금 나를 나라고 느끼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가슴을 두드릴 때마다 섬뜩해지곤 했습니다. "나는 토하고 싶었다. 자, 이렇게 된 일이다. 그 이후로 구토는 날 떠나지 않고, 날 꽉 붙잡고 있다"(53).

<구토>를 읽으면서도 가장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이 바로 그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아, 구불구불 길게 이어지는 이 존재한다는 느낌! 이것을 나는 아주 천천히 길게, 길게 늘여나간다 …"(234). 존재한다는 느낌, 내가 존재하는 게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바로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라는!

"모든 것이 무상적이다. 이 공원도, 이 도시도, 그리고 나 자신도. 간혹 이 사실을 알아채게 되는데, 그러면 속이 뒤집어지고, 저번 저녁에 랑데부 데 슈미노에서 그랬듯 모든 것이 둥둥 떠다니기 시작한다. 이게 바로 구토다"(306).

'삶'에 대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혐오를 느꼈을 때, 나의 가장 큰 바람은 완전한 무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나라고 느끼는 이 의식이 완전한 '무'로 흩어져버리는 것 말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우연적이고, 그래서 그 무의미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으로, 완전한 무상이 되는 것을 꿈꾸었다니, 이제와 생각해보니 지독한 아이러니였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무상하여 괴로운 것을, 무상하겠다고 발버둥친 꼴이었습니다.

<구토>를 읽었지만 읽지 않았고, 읽지 않았지만 읽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분명 이 책에 적힌 글자들을 눈에 담았으나, 마음에 뭉근하게 풀어지는 의미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구토>의 더 깊은 문학적 가치와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 해설들을 의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이 책이 유명세 만큼 널리 읽히지 못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어려웠던 것입니다! 삶이라는 것, 더구나 창조주가 부재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이 책을 이해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의 존재 자체가 우리 실존의 현주소를 가리키는 중요한 지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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