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트
아네 카트리네 보만 지음, 이세진 옮김 / 그러나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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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들의 넋두리를 들으면서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들의 판에 박힌 일상에 코웃음 치고

남몰래 그들의 어리석은 근심 걱정을 비웃은 적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50)

<아가트>의 화자는 은퇴까지 5개월을 남겨둔 일흔 두 살의 정신과 의사입니다. 상담 회기로는 정확히 800회를 남겨 두고 있는 이 주인공은 해치우듯 남은 상담을 진행하며, 진료소의 벽 안에 갇혀 보내는 지루하고 보람없고 무의미한 시간들을 견디는 중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편견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요? 내담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도 않고, 상담 중에 딴 짓을 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지도 않는 정신과 의사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사교성도 없고, 기력도 없이, 진료소에 앉아 지독한 좌절감과 비참함을 느끼고 있는 이 정신과 의사에게 무엇보다 더 정신과 상담이 시급해 보입니다. 몸뚱이가 말을 잘 듣지 않는 노인의 건조하고 반복적인 일상의 너무나 생생한 피로감과 우울감을 마주하고 나니, 나이든다는 것, 특히 몸이 늙는다는 것이 처음으로 무서워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스스로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요. 하지만 삶이 자꾸 저한테서 도망가요

… 하지만 어떻게 그 안으로 들어가는지 전 모르겠어요"(62-63).

은퇴 이후의 보상을 기다리며, 이 지리멸렬한 시간을 어서 끝내고 싶은 의사에게 가장 필요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환자'일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아가트 지레므만'이라는 새로운 환자가 찾아옵니다. 말할 상대가 필요하다는 '아가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우울하고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의사에게 막무가내로 상담을 부탁하며 진료 약속을 잡습니다.

병이 씻은 듯이 나을 것이라는 기대도 없이, 다만, 자신에게서 자꾸만 도망 가는 삶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싶다는 '아가트'와의 만남은, 이 정신과 의사에게 '낯선 자기 자신을 퍼뜩 발견'하는 시간이 됩니다. 의사는 이렇게 고백하지요. "경이롭지만 금지된 선물이 내게 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72). 다리가 부러진 채로 다른 사람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구경하는 구경꾼인 것처럼, 인생이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아가트를 보며, 자신의 삶에 내려앉은 자욱한 안개 같은 절망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아가트가 그렇게 해주기를 바랬기 때문일까요? 의사는 아가트와의 대화를 즐기며, 아가트와의 상담이 진행될수록,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써주는 일에 스스로 용기를 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써줄 수 있는 용기! <아가트>는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능력인지를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이 바로 이것이었음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건강하다는 증거라는 것도요!

"하지만 선생님, 어떻게 자신의 고통을 제대로 보지 않은 사람이

남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을 평생 할 수 있나요?"(122)

<아가트>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통해 치유하는 직업을 가졌으면서도, "일단 진료실을 벗어나면 다른 인간과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아예 모른다"는 정신과 의사, "누군가와 정상적인 대화를 나눈 지가 너무 오래되어 진지하게 그 생각을 하면 상처가 될 지경"(79)이라고 고백하는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입니다. 환자의 고통보다 자신의 비참함에 더 몰두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의사 선생님은 정작 자신의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참함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문제에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없었을지도요. 자신의 고통을 외면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며,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 스스로의 고통도, 서로의 고통도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이 아가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자신이 완전히 독특하다고 느끼는 동시에 완전히 하찮은 존재라고 느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89). 우리는 어떻게 해야 완전히 비참해지지 않으면서도 교만하지 않게 자신의 삶을 당당히 살아갈 수 있을까요? 자신의 '독특함'과 동시에 '하찮음'을 둘 다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가능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기에는 너무 짧고, 하루하루 조금씩 무너져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에는 너무 긴 것이 인생이라지만, <아가트>에는 생을 긍정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인생의 비참함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보여주면서도 그것을 긍정하고 있지요. 자기 자신의 독특함과 하찮음을 모두 볼 줄 아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서로를 더 잘 참아줄 수 있고,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써줄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될 때, 우리는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끝으로, 이 책에서는 "계피가루를 뿌린 사과가 오븐에서 익어가는 냄새"(47)가 난다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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