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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 책 읽어드립니다, 임기응변의 지혜, 한 권으로 충분한 삼국지
나관중 지음, 장윤철 편역 / 스타북스 / 2020년 8월
평점 :
"싸우지 않고 물리치는 것이 최선이다"(65).
고등학교 졸업식 다음 날 아침! 그 아침을 절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대입에 실패하고, 재수에도 별 뜻이 없었던 저는 잠이 깬 채로 한참을 침대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할 일이 없구나 하는 자각이,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없구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지니, 잠에서 깼지만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습니다. 어제까지는 그래도 '졸업식'이라는 목표(?)가 있으니 할 일 없이 놀면서도 괜찮았던가 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왜'라는 의문 없이 늘 당연하게 맞이했던, 그 '당연'한 하루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것은 한 번도 상상해보거나 경험해본 적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삼국지>라는 첵을 볼 때마다, 그날 그 아침이 떠오릅니다. 어떤 말로도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신 아버지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딸을 지인에게 부탁해 출판사에 밀어 넣었습니다. 등떠 밀려 갔지만, 사실 그것말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규칙적으로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는 날이 반복될수록 이상하게 더 무기력해졌습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다시 같은 생활이 반복되던 어느 날, <이문열의 삼국지>로 불리던 책 10권을 들고 골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골방에서 나왔을 때, 아마도 마음의 근육이 조금은 단단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인생을 길게 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처음으로 주어진 하루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새벽을 맞이했습니다. 새벽 버스를 타고 단과반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기분이 제법 상쾌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삼국지>는 그렇게 인생책이 되었는데, 어디 가서 <삼국지>가 나의 인생책이라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줄거리를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지> 만큼이나 전투와 등장인물이 많은 <왕좌의 게임>이라는 미드를, 영상으로도 보고 책으로도 읽는 동생을 보면서, <삼국지>도 그렇게 도전해보고 싶었지만, 워낙 내용이 방대하니 쉽게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스타북스가 한 권으로 내놓은 <삼국지>는 저와 같은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너무 방대한 양 때문에 쉽게 도전하지 못했던 독자들에게 접근성이 좋은 책이라는 장점도 있지만, 저처럼 <삼국지>를 한 번만 읽은 독자들, 한 그루, 한 그루 나무를 보는 재미는 있었지만 숲을 보는 눈을 갖지 못해 아쉬웠던 독자들이 더 반길만한 책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이 말이 이 대목에서 나오는 것이었구나', '아, 이 인물이 이때 등장하는구나', '아, 이 승부가 결국 이렇게 끝났었구나' 다시 확인하며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삼국지>를 읽고 나서도 늘 헷갈렸던 것은 이것이 소설인가, 역사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한 권으로 충분한 스타북스의 <삼국지>를 다시 만나면서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삼국지>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삼국지>는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책입니다. "신발을 팔고 천을 짜는 일을 하고 있었으나 기개가 남다르고 인품이 고상하여 누구나 그의 온몸에서 뿜어 나오는 영웅의 기질을 느낄 수 있었다"(17)는 유비, "술 팔고 돼지 잡는 일을 생업으로 하고 있지만 그저 당장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이지 대장부로서 이 일을 평생 할 생각은 없"(18)었던 장비,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의협심에서 10여 명의 못된 무리를 죽이고 그 죄를 면하려고 강호를 떠돌고 있"(19)던 관우, 모두 난세가 만들어낸 영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국지>는 천하를 위해 큰일을 하고자 하는 대장부들이 패권을 놓고 다투는 용맹과 지략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싸움은 다투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고, 천하를 어지럽히고 근심케 하는 자를 다스려 태평을 이루고자 함이니, 가장 뛰어난 고수는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용맹함보다는 처세나 술수와 같은 지략이 더 빛을 발하는 전투가 그려집니다. 또한 큰 뜻을 품었다고는 하나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었으니, 행동의 방자함과 교만한 자, 시샘하고 경계하는 자, 이에만 눈이 멀어 의는 가벼이 여기는 교활한 자, 배은망덕한 자는 스스로 품은 큰 뜻이 칼날이 되어 결국 스스로를 헤치고 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장수의 기량은 지니고 있으나 사람됨은 보잘 것 없었던"(37) 여포가 끝내 영웅이 되지 못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리고 일인자는 아니었지만 충과 의로 그 용맹함을 더욱 빛나게 한 '조자룡'이 저에게 여전히 가장 빛나는 영웅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대업을 이루고자 하는 이는 사람을 근본으로 삼습니다"(165).
한 권으로 다시 읽은 <삼국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어려울 때마다, 어려울수록 박장대소를 호탕하게 터트리는 '조조'의 모습입니다. 그 많은 실패와 실수를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힘이 여기에 있었던가 싶습니다. 오히려 세를 넓히고 권세를 다질수록 그 웃음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며 안타까울 지경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삼국지>가 가르려주는 가장 중요한 인생교훈이 있다면, "대업을 이루고자 하는 이는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다"가 아닐까 싶습니다. 암투와 배신이 비일비재한 전쟁터 속에서는 누구를 믿어야 하고, 누구를 의심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일이 승패를 가릅니다. 지형을 읽고 병법을 펼치는 것보다, 이간질과 음모가 난무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삼국지>는 사람을 얻으려는 자는 인재를 알아보고 대우할 줄 아는 자이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한편으로는 우유부단하고 뛰어난 지략을 갖추지도 못한 유비가 지금처럼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람됨을 알아본 영웅호걸들이 앞다투어 그에게로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탁월한 리더일수록 사람을 얻는 일이 더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재능을 귀하게 여기기보다 경쟁적으로 생각하기 쉬울 테니까요. 진짜 탁월한 리더는 사람을 얻는 리더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봅니다.
<삼국지>를 다시 읽고 보니, 가장 뛰어난 처세는 '겸손'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갈공명이 아무리 빼어난 지략가라고 해도 결국, '천운은, 누구의 편인가'가 운명을 갈랐음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결국 그 걸음을 인도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며칠 밤, <삼국지>를 아껴 읽으며 즐거웠습니다. 많이 압축되어 있지만, <삼국지>의 맛을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한 권이라고는 하지만 이도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인데, 두껍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한 번은 읽어야 한다는 <삼국지>, 이 한 권으로 시작하는 것도 지혜일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