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의 정원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고요한숨 / 2020년 8월
평점 :
품절






귀하가 왜 거기 있는가.

저는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귀하는 거기 있습니다.

귀하는 인류 존속의 열쇠입니다(61).

우린 언제부터인가 '이상'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다고 느낍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장래의 꿈이 무엇인지 말하기를 즐겨했었는데, 그때 우리의 꿈들은 단순한 소망으로 가득찬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청소년들에게 장래의 꿈이 무엇인지 물어 보면, 진학상담 선생님보다 더 현실적인 말투로 자기의 '가능성'을 단정해버리곤 합니다. 졸지에 철없는 어른이 된 것아 머쓱했지요. 대학가 주변에서 살았던 시절, 버스를 타면 청춘들이 쏟아내는 뜨거운 이상과 낭만, 분노를 말없이 듣고 있다 덩달아 뜨거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대화의 주제들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현실에 더 잘 적응하게 된 것인지, 길들여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의 꿈은 더 이상 하늘 위에 떠있지 않습니다.

<멸망의 정원>은 평범한 한 일본 남자의 우울한 현실과 꿈 속 세상의 대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쓰다 망가지면 버리는 물건처럼 직원이 늘 교체되는 회사에서 매일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하고, 노동기준법에 위반하는 야근에 시달리고 있는 '스즈가미 세이치'는 식욕도 없고, 몸도 피곤하고,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합니다. 마음이 맞는 것도 아니고, 집안일에 충실한 것도 아니고, 집에 없는 날이 더 많은, 어쩐지 미덥지 못한 아내와의 결혼생활도 우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지만, 악을 쓰고 있는 자신의 모습. 이게 결혼생활의 현실이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출근하는 전차에서 우연히 본 한 여인에게 순간 사랑을 느낀 '스즈가미 세이치'는 자기도 모르게 그 여인을 따라 전차에서 내렸다가 길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앞에 오히려 꿈 속 같은 세상이 펼쳐집니다. 그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왜 그곳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곳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는 세계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동이 먹고 싶다고 생각하며 골목을 돌면 우동 가게가 나타나는. '스즈가미 세이치'가 그 낯선 동화 속 세상에서 적응해갔던 과정을 뒤짚어 보면서, 아, 이 불행했던 남자가 꿈꾸었던 세상, 그가 원했던 행복이 이런 것이었구나 생각하니 괜히 뭉클해지기도 합니다. 다정한 이웃, 맛있는 탄탄면과 티크재 테이블, 별이 총총한 하늘,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 것, 친절한 마음들, 그리고 사랑. 그것이 무엇이든 그 세상은 그가 원하는 것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스즈가미 세이치'는 곧 거부할 수 없는 진실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외우주에서 날아온 '미지의 존재'가 지구에 들러붙어 있는데, 그 '미지의 존재'는 해파리 모양이고, 그 중심부에 핵이 있고, 핵 부근에 한 인간이 있는데, 그가 바로 '스즈가미 세이치'라는 것입니다. '미지의 존재'에게 납치를 당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주 해파리 속에서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꿈의 세계, 즉 일종의 꿈의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지구에 사는 모든 인류가 그가 깨어나 그 핵을 파괴해주길 바란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가 꿈꾸듯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지구는 '푸니'라 불리는 괴생물체에 의해 파괴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푸니'라는 괴생명체가 '미지의 존재'가 발산하는 에너지에 의해 활성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들은, 핵 바로 옆에 있는 '스즈가미 세이치'가 '미지의 존재'를 소멸시킬 열쇠, 동시에 인류를 존속시킬 열쇠라고 믿습니다.

이 세계(상념의 세계)는 너무나 기묘해서,

당신이 희망을 품으면 계속 이어지고

당신이 절망하면, 즉 더는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

핵이 파괴되고 세계가 종말을 맞습니다(339).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꿈의 세계에서 자신이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인류는 멸망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맞을까요? 우울하지만 현실인 세계와 행복하지만 가상인 세계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세상에서 사는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시즈가미 세이치'가 핵을 파괴한다면,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멋진 환상의 세계는 소멸할 것입니다.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딸도 함께 말입니다. 그것은 어차피 상념의 세계이니 어려울 것 없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 '미지의 존재'에게 '스즈가미 세이치'가 선택된 것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이지만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희망하는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면, 어느 그림책 세상보다 더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스즈가미 세이치'의 상념의 세계를 누가 쉽게 허황되다 치부할 수 있을까요? '스즈가미 세이치' 입장에서 보면, 그에게 강요된 것은, 더이상 희망을 품지 말라는 것, 즉 모두를 위해 스스로 희망을 파괴하고 절망하라는 가혹한 요구였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인류 멸명과 맞바꿔서 그림책 속의 시민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곧 죽더라도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환상의 행복 같은 것보다는 현실을 택하겠습니다(84-85).

<멸망의 정원>은 가상의 세계를 잃고 싶어하지 않는 '스즈가미 세이치'와 대결하는 인물들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지구에 들러붙은 환영을 파괴하라'는 작전명을 가진 '돌입자'들입니다. 이 '돌입자'들은 '푸니' 내성진단에서 저항치가 최고치인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저항치가 최고라는 것은, 파괴적인 현실이지만 현실에 적응을 잘 한다는 의미일까요? 아니면, 희망을 빼앗기지 않는 힘이 남보다 강하다는 것일까요? 혹시 더 현실적이라는 것과 더 희망적이라는 것은 결국 같은 의미일까요? 현실에 뿌리를 내린 희망이야 말로 참된 희망이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진실이란?

신념이란?

<멸망의 정원>이 현실세계와 상념의 세계라는 대비를 통해,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세계관은 무엇일까요? 현실을 부정한 채, 가상의 세계에 빠져 사는 현대인의 자화상? 아니면, 집단을 위해 희망을 거세당하는 개인의 불행? 아니면, 모두의 희망을 집어삼키면서도 결국 만들어지고 있는 건 파괴적인 세계라는 우울한 현실 인식?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보입니다. 불행에 진정으로 저항하는 것은 외면이 아니라, 희생적인 참여라는 것입니다.

<멸망의 정원>은 현실세계와 가상세계, 그리고 그 안에서 지옥의 혼돈과 천상의 질서가 충돌하는 모습을 통해, 결국 우리가 만들어가는 세상은 신념의 충돌임을 보여줍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세계를 구할 각오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또 자신의 쾌락과 안락을 위해 지구를 배반하는 쪽을 선택하는 사람도 존재입니다. 인간의 삶은 시소를 타듯 늘 이 선택 위에서 흔들리고 있지만, <멸망의 정원>이 보여주는 분명한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지옥의 혼돈에 빠져 있다면, 그것을 외면한 채로는 그 위에 나 혼자만의 천상의 질서를 절대로 건설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상의 지옥 같은 현실을 겪었느냐 안 겪었느냐가 스즈가미 씨와 노나쓰 씨의 차이겠죠"(337).

재미있게 잘 읽히면서도, 묵직한 주제들을 던져주는 책입니다. <멸망의 정원>이라는 책 제목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음미해보게 되는데, <멸망의 정원>이 상징하는 바가 파괴적인 현실의 혼돈일 수 있겠지만, '돌입자'의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환상으로 존재하는 아름다운 정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읽었을지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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