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종호 판사의 선, 정의, 법 - 하나님의 선은 어떻게 인간 공동체에 구현되는가
천종호 지음 / 두란노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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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앞에 당신의 외아들과 인류 최고의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병들어 누워 있다고 가정하자. 치사율이 높은 병인데, 한 사람분의 약밖에 없다. 한 사람의 치료제만 손에 들고 있는 당신, 외동아들과 아인슈타인이 서로 살려 달라고 외치는 상황에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12장. 정당한 몫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中에서

<천종호 판사의 선, 정의, 법>은 이에 대해 우리가 세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외동아들에게 투약한다면 이것은 정의관에서 공동체주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아인슈타인에게 투약한다고 하면, 정의관 중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동전을 던져 제비를 뽑아 투약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간의 가치가 동등하므로 누구에게 투약하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 되고, 이는 정의관 중 자유주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169).

이 책은 현직 판사의 시선으로 우리 삶과 법 집행의 영역에서 '선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법이란 무엇인가'를 숙고해보는 책입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에피소드 중심이 아님에도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게 잘 읽힌다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학부 교양수업에서 다루어질 만한 개념적 지식들이 쏙쏙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내용인데도 (심지어 법과 관련된 내용들이) 재미있게 잘 읽히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또 하나 유익했던 것은, 이 책을 읽고 나니 각종 매체를 통해 보도 되는 사회 문제의 '숨은 쟁점'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개인으로 조각조각 나면서 모두가 나의 '권리'를 주장하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의 삶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고려해야 하고,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의 문제가 '좋은 삶'의 문제라면, 정의의 문제는 '옳은 삶', 드워킨의 표현대로라면 '잘 살기'의 문제일 것이다"(105).

선과 정의, 법의 문제는 결국 존재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선과 정의, 그리고 법은 당연하게 '공동체'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이 책이 다루는 선과 정의와 법은 '공동체를 위한 선'(1부), '공동체를 위한 정의'(2부), '공동체를 위한 법'(3부)입니다.

천종호 판사님은 선과 정의, 법의 관점에서 잘 산다는 것과 좋은 삶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06). 선이 좋은 삶의 문제라면, 정의의 문제는 옳은 삶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정의의 문제, 다시 말해 옳은 삶이란, 인간이 인간을 "정당하게 대우하고 대우받는 삶"(115)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문제는 정당한 자기 몫, 즉 '분배'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설명을 들으니, 인간 삶의 문제라는 것이 한 없이 복잡하면서도 또 생각보다 단순한 원리 속에 있다는 것이 처음으로 깨달아졌습니다.

다시 말해, 선과 정의가 인간다운 삶을 떠받치는 초석이요, 법은 그것을 수호하고 지켜주는 안전장치라고 할 때, 어쩌면 이 책이 던지는 가장 충격적인 시사점은 이것이 아닐까요? "왜 법학에서는 정의와 선에 관한 문제를 가르치지 않는가?" 천종호 판사님은 법학에서 선과 정의에 관한 논의가 사라져 버렸다고 폭로합니다. "우리 법학계에서는 선과 정의의 문제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고, 법 실무계에서도 선과 정의의 문제가 심도 있게 논의되지 않고 있다. 특히 헌법 재판에서도 선과 정의를 둘러싼 논의보다는 권리를 둘러싼 논쟁이 우선되고 있다"(11).

"도덕성의 회복은 선의 회복이고, 선의 회복은 정의로운 신의 귀환이다"(269).

기독교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책은 기독교 변증서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신'의 존재가 철학, 윤리학, 정치학, 법학에서 사라질 때, 인간의 삶이 어떤 혼돈에 빠질 수 있는지를 설명해주기 때문입니다. 신의 존재가 전제되지 않으면, 왜 선을 잃어버리게 되는지, 왜 어디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를 찾을 수가 없는지, 왜 도덕 윤리가 아니라 도덕 논리가 만연해질 수밖에 없는지, 왜 사랑의 책무가 정의가 아니라 호의나 자선의 차원에서 접근하게 되며, 그럴 때 어떤 문제가 발생되는지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부자'로 사는 것을 '잘 사는 것'이라고 착각하여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향해 이 책은 진짜 '잘 사는 것'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해줍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으로 사는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법(말씀)의 아름다움을 다시 깨닫게 해주며, 우리의 책무가 무엇인지 깊이 돌아보게 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흔히 사랑의 공동체라고 하는데, 왜 정의가 전제되지 않으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없는지의 문제도 깊이 숙고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의의 공동체'에 발을 붙이고,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정의의 공동체를 무시한 채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할 수는 없다. 정의는 사랑의 최소한이고, 사랑은 정의의 최대한이다. 우리 삶은 정의를 무시한 채 사랑으로 비약할 수 없다. 각자에게 정당하게 대우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정의가 전제되지 않으면 희생과 용서로 이루어진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120-121).

좋은 삶, 잘 사는 삶, 품위 있는 삶을 위해 모두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재미있고 유익한 교양수업이었다고 평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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