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 용서받을 자격과 용서할 권리에 대하여
시몬 비젠탈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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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의 핵심은 결국 '용서'에 대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망각이란 오직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지만 용서는 인간의 의지에 달린 문제이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고난을 당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 벌어진 이 비극적인 이야기를 읽은 독자들도, 나와 입장을 바꾸어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156)

저자인 시몬 비젠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학살자들에 의해 무려 89명이나되는 일가친척을 잃고 아내와 단 둘이서만 살아남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증인으로, 전쟁이 끝난 후 미국전쟁범죄조사위원회 및 유대역사기록센터 등에서 활동하며 "무려 1,100여 명이나 되는 나치 범죄자들"을 법정에 세워 심판을 받게 한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이 책을 통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제기된 가장 강력한 윤리적 질문"을 던져놓았습니다.

저자는 침대에 누워 죽어 가던 한 SS대원 청년과 만났던 일화를 들려줍니다. 학살에 참여했던 그 청년은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다 죽기 전, 어느 유대인 한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손을 꽉 붙잡으며 그토록 간절히 용서를 구하는 그 SS대원을 외면한 채 아무 말도 없이 그곳을 나와 버립니다. 그 청년이 참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용서의 말을 할 수 없었던 시몬 비젠탈은 그런 사실 때문에 고민하고 그 고민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와의 만남은 내게 커다란 짐이 되었고, 그의 고백은 나를 깊이 흔들어 놓았다"(95). 그리고 이제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자신의 입장이 되어보라고 요청합니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내가 그때 그 죽어 가는 SS대원과 함께 병원에 있았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요?" 이것은 독자 개개인의 양심에 던져지는 상황적 질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범죄와 속죄에 관한 보다 거대한 담론이기도 합니다.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는 이 질문에 대한 53인의 답변(심포지엄)을 함께 엮고 있습니다. 답변자들은 저마다의 양심적, 심리적, 경험적, 도덕적, 윤리적, 정치적, 종교적, 신앙적, 인도주의적, 철학적 가정 하에서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에 대한 답변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중 에바 플레이슈너(가톨릭 신학자, 미국인)의 경험이 흥미롭습니다. 홀로코스트 관련 강의 때마다 매번 학생들은 이 책의 내용을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데,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기독교 신자인 학생들은 하나같이 용서를 주장한 반면 유대인 학생들은 하나같이 시몬이 카를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 정당했다고 주장한 점이다. 거의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말이다"(227).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124).

개인적으로 '용서'에 대한 교리(말씀)를 열심히 배우고 가르쳐온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가장 깊이 공감하며 마음에 새긴 교훈은, 누군가에게 함부로 용서를 강요할 권리가 내겐 없다는 것입니다. "섣부른 용서는 희생자에 대한 배신이다"(178)는 모세 베이스키의 말처럼, 값싼 은혜는 희생자들에게 대한 또다른 모독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전부터 전 세계의 여러 성직자들과 박애주의자들과 철학자들이 나치를 용서하자고 전 세계를 향해 탄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타주의자들 가운데 대부분은 남에게 뺨 한번 맞아 보 적도 없는 주제에, 수백만의 무고한 사람을 죽인 살인자들을 동정하고 있었던 것이다"(138).

이 책은 (쉽게) 용서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에겐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일깨웁니다. 용서가 피해보다 더 큰 고통과 희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숭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당연하게 요구하고 강요할 권리가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용서의 문제에 대해 좀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많은 희생자들이 자네에게 권리를 위임하지 않은 이상, 자네로서는 그를 용서해 줄 권리가 없기 때문이지. 누군가가 자네에게 저지른 짓에 관한 한, 자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용서하고 잊어버려도 되지.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할 문제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자네의 양심으로 무마하려는 것은 오히려 끔찍한 죄가 될 수 있을 거야"(108-109).

"자기와 똑같은 인간이 이처럼 끔찍한 모욕을 당하는 광경을 말없이, 항의 한마디 없이 바라보는 것 역시 악랄한 행동 아닐까?"(97)

어쩌면 나치가 저지른 혐오스러운 악행이 언제고 반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그 SS대원처럼 우리도 범죄를 저지르도록 세뇌당할 수 있는 연약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진정한 참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의 모든 답변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은 "참회 없이는 용서도 없다"는 것이니까요.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경험한 인류가 "용서받을 자격과 용서할 권리에 대하여" 씨름하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고문, 모욕, 살인과 같은 위법 행위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도 마찬가지로 유죄라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의 작은 보금자리가 평화롭고 안전하기만을 바라는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수백만 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생각을 일종의 발판으로 삼아, 나치 범죄자들은 권력을 획득하고 또 유지할 수 있었다"(148).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먼저 말해야 할 것은 용서나 화해가 아니라, 나의 죄인됨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코 잊지 말자"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홀로코스트의 가장 분명한 교훈이 아닐까](로버트 매커피 브라운, 192).

개인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모욕과 배신을 당하고 마음이 지옥일 때 이 책을 읽었습니다. 시몬 비젠탈이 그 SS대원을 만난 것은 마음의 큰 짐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치유의 시작이기도 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1,100명의 전범자들을 집요하게 추적해 법정에 세움으로써 얻으려 한 것은 처단의 의미보다 정의가 존재한다는 믿음, 인간성에 대한 믿음,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 이외의 것들에 대한 나의 믿음을 되찾으려 한 것"(137)이었음을 생각할 때, 그 시작은 그 SS대원으로부터 진정한 참회의 증거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으니까요. 진정한 참회의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전 세계의 독자 앞에 이 묵직한 질문을 던질 필요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는 우리에게 비극적 역사를 (올바로) 기억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누군가 나의 아픔을 진정성 있게 들여다 보아주고, 그 고통을 깊이 공감해주고, 내가 당한 일은 옳지 않은 일이었다고 말해줄 때, 다시 회복되고 치유되는 것을 경험했으니까요.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는 함부로 용서를 말할 수 없게 하는 책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화해, 진정한 용서로 나아가는 길을 함께 모색해보도록 만드는 힘이 있는 책입니다. 이 비극적인 역사가 소설처럼 아름답게 읽히며 강렬한 감동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시몬 비젠탈의 인간적인 고뇌가 그 처첨하고 처절한 비극 속에서도 선한 양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그 스스로 은혜 베풀기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묵직한 주제이지만 잘 읽히는 책입니다. 모든 분야의 필독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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