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생을 바꾸려면 공간을 바꿔야 한다"(203).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대한민국 남자들 사이에서 '자기 공간 갖기' 열풍이 불지 않을까 하는 예측을 조심스레 해봅니다.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이 어렵다면, 하다 못해 여자들의 화장대와 같이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라도 말입니다.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는 "공간"이야말로 내 아이덴티티라는 색다른 주장(?)을 펼치는 책입니다. "슈필라움", 즉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 공간"(6)의 부재가 우리 삶을 얼마나 불안하고 뻑뻑하게 만들고 있는지 곱씹어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공간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저 남쪽 섬 여수에서 현실로 구현해내고 있는 김정훈 화가(이제는 화가라고 불러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는 자기 공간이 있어야 할 이유를 이렇게 피력합니다. "공간이 있어야 '자기 이야기'가 생긴다. '자기 이야기'가 있어야 자존감도 생기고, 봐줄 만한 매력도 생기는 거다. 한 인간의 품격은 자기 공간이 있어야 유지된다"(206).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서기를 바래봅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이들이, 특히 남성들이 자기 이야기를 가진 매력적이고 품격 있는 인생을 살기 바라니까요.

"공간이 의식을 결정한다"(11).

문화심리학자로 꽤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김정운 교수님이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와 '나름 화가'의 삶을 살고 있다는 소식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김정운 교수님의 인생 하프타임과 같은 시기의 기록입니다. 여수 남쪽 섬의 다 쓰러져가는 미역창고를 충동적으로 구입하여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는 김정훈 교수님은 그 공간을 여수만만(麗水漫漫)의 "미역창고"(美力創考)라 이름붙였습니다. "아름다움의 힘으로 창조적인 생각을 한다"(56)는 뜻이랍니다. "쿠바에 가면 헤밍웨이의 서재가 바닷가에 있다"(57)고 하는데, 여수에 가면 김정훈 교수님의 작업실이 바닷가에 있다고 말하여질 것 같습니다.

400만 원에 구입한 낡은 배를 수리하는 데는 900만 원이 들어가고, 다 쓰러져가는 창고를 시세보다 두 배나 비싼 값을 주고 산 '정신 나간 사람'이란 비웃음을 당해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자기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남은 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 정확히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책은 그 바닷가 작업실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시간의 흐름이요, 그 공간과 시간을 따라 흘러가는 문화와 사회에 대한 통찰이요, 그 흐름 안에서 민낯으로 마주하는 자기 성찰입니다.

"지금 내 삶이 지루하고 형편없이 느껴진다면, 지금의 내 관점을 기준으로 하는 인지 체계가 그 시효를 다했다는 뜻이다. 내 삶에 그 어떤 감탄도 없이, 그저 한탄만 나온다면 내 관점을 아주 긴급하게 상대화시킬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다"(221).

원래도 글을 잘 쓰시는 줄 알았지만,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는 특히 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모든 남성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여유로우면서도 깊이가 있고, 무거운 주제도 흥미롭게 다루는 솜씨가 있습니다. "나는 책을 사려고 여행을 합니다"(272)라는 문장만으로도 김정운이라는 한 사람에게 반하기에 충분하고, 이 책이 얼마나 품격 있는 책인가를 말해주는 듯 했습니다.

책을 덮으며 까먹지 않으려고 다시 한번 읽고 밑줄 치며 되새김질 해보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여수 바닷가에 작업실을 마련하며 "정말 후회하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걱정을 김정운 교수님은 이렇게 간단히 정리했다고 합니다. 한 일에 대한 후회보다 하지 않는 일에 대한 후회가 더 오래간다고 말입니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오래 가지 않는다.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잘못되었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지 않는 일에 대한 후회'는 쉽게 정당화되지 않는다. …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그 일을 했다면' 일어날 수 있는 변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심리적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비된다. 죽을 때까지 후회한다는 이야기다"(60-61).

바닷가 작업실을 보며, 누군가는 마냥 부러울 수도 있고, 누군가는 무모하다고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자신의 신세를 탓할 수도 있겠지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그 에너지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에너지를 함께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