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나 읽을걸 - 고전 속에 박제된 그녀들과 너무나 주관적인 수다를 떠는 시간
유즈키 아사코 지음, 박제이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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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편견을 버리는 순간,

고전 속 여주인공들은

파멸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직진하는 생의 주인으로 우뚝 선다.

- 뒷 표지 에서

<책이나 읽을 걸>, 이 책은 고전 속 여주인공들의 삶을 독특한 방식으로 재구성한 에세이입니다. '독특한 방식'이라 함은 어떤 문학적인 해설에도 기대지 않고, 객관적인 감상을 추구하지도 않은 채, 지극히 주관적인 고전 읽기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 듯, 톡톡 튀는 고전 속 여주인공들처럼 제멋대로였다 정숙했다를 반복하며 두통수를 치듯 자유롭습니다. 친구들과 나누는 수다에서 중요한 것은 '내 느낌'이라는 듯, 작가는 자기의 감정(감상)에 솔직합니다.

고전을 읽노라면 해방감을 느끼는 순간이 몇 번이고 찾아온다.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지 못했던 시대에 이토록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간 주인공들. 그것만으로도 구원을 받고 용기를 얻는다(64).

<책이나 읽을 걸>의 가장 큰 장점은, 마치 낯선 세계를 여행하며 친구를 사귀듯,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은 서로 닮은 사람들끼리 친구가 되고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확인하게 되는 사실은 닮은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순간보다, 나와 달라도 한참 다른 사람에게서 '쨍'하고 느끼는 매력이 훨씬 신선하고 강렬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서양 고전소설을 좋아하는 한 가지 이유는 등장인물들의 '지나침' 때문이다. 화가 나면 상대방에게 장장 한 페이지에 걸쳐 할 말, 못 할 말 마구 퍼붓지 않나, 충격을 받으면 갑자기 기절해버리지 않나, 실연을 당하면 병으로 쓰러지지 않나, 하인에게 닥치는 대로 화풀이를 하지 않나, 욕심이나 증오 같은 감정을 몇 년이고 끈질기게 질질 끌지 않나(218).

이 책의 매력은 우리와 다른 세계에 속한 것만 같았던 고전 속 여주이공들의 삶이 생생한 입체감을 가지고, '오늘, 여기, 이 자리'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통해 애써 나의 삶을 대입해보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그녀의 삶에 '여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의 삶이 오버랩됩니다. 작가가 가진 이야기의 힘이겠지요. 지루한 삶보다는 파멸일지라도 철저히 욕망을 따라가며 자기 삶을 탐욕스럽게 살아내고, 제멋대로 행동해도 '그런 네가 좋다'라고 말해줄 단 한 명의 기특한 남자를 찾느라 상처 입고 또 상처 입어도, 여자가 자신보다 잘난 것이 가장 두려운 남자의 폭력에 맞서 악녀가 되는 것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온 힘을 다해 반발하며 속절없는 야망을 불태우기도 하고, 파워 게임 속에서만 살 수 있는 인간 세상에서 철저히 짓밟히면서도 전통을 깨부수는 한 마리의 파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자의 이야기는 결국 사랑도, 결혼도, 출산과 육아도, 평온한 일상도, 남자도, 심지어 자기 자신도 여자를 구원할 수 없다는 '나쁜 쾌감'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무엇인가 여자끼리 서로 오룻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평온한 즐거움을 선물해주기도 합니다. 남자와 여자, 문화와 지역, 시대와 세대를 인간미라고 할까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은 때로는 무기가 된다. 갖고 싶은 것을 갖고 싶다고 외치는 뻔뻔함은 그것만으로도 일종의 위협이다(44).

<책이나 읽을 걸>은 악녀라도 손가질 받고, 뻔뻔하다고 외면 받고, 속물이라고 멸시했던 인물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져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됩니다. 삶에 대한 탐욕은 활기가 되고, 나쁜 사람, 나쁜 인생이라고 쉽게 단정지었던 누군가의 삶이 사실은 지독한 결핍에 시달린 가련한 인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기밖에 모른다고 생각했던 삶의 태도가 사실은 자기 삶을 즐기는 데 일가견이 있었던 것이라고 다시 보아지게 되니까요. 어쩌면 책 속 여주인공들처럼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 태연하게 미소 지을 수 있는" 내공이 좀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이 책의 작가처럼 말입니다. "물론 팜파탈 자체는 무척 눈부신 존재이지만 '로맨스 따위 없어도 괜찮아!'라는 생각은 실로 평화롭고 부족함 없이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56). <책이나 읽을 걸>은 책이 얼마나 훌륭한 친구가 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친구 같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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