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새끼손가락은 수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 W-novel
사쿠라마치 하루 지음, 구수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내 핸드폰 번호랑 생일을 좋아하는 것뿐야"(35).

'라이트노벨'이라는 장르의 소설을 처음 읽었는데, 어렸을 때 많이 있던 '하이틴 로맨스'와 닮았습니다. 찾아보니, 중-고등학생을 주요 타깃으로 하여 읽기 쉽게 쓰인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라고 하는데, 라이트노벨이란 말 그대로 가벼운 소설 정도로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새끼손가락은 수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친구를 만들지 않는 인종"(그)과 "친구를 만들 수 없는 인종"(그녀)이 서로에게 '운명'을 느끼며 사랑으로 치유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뻔할 수도 있는 로맨스가 특별해지는 건 그들의 운명이 '수식'(수학)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쉬는 시간이면 언제나 교실에 홀로 있고, 혼자서 조금 어려워 보이는 책을 읽으며, 누구와도 엮이려 하지 않고, 누구와도 친해지려 하지 않는 '나'에게 어느 날, '아키야마 아스나'라고 하는 같은 반 여학생이 말을 걸어옵니다. 그녀가 건넨 첫 마디는 "전향성 건망증"이었습니다. 수학 천재이며, 예쁘기도 한 아키야마 아스나가 다소 엉뚱해 보였던 건, 그녀가 전향성 건망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향성 건망증이란, "사고나 상처, 병으로 뇌에 손상을 입음으로써 그 시점을 경계로 새로운 기억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기억 장애"(19)를 말합니다. 아키야마 아스나가 전향성 건망증을 앓기 시작한 것은 심장이식 수술을 받고부터입니다. 

아카야마 아스나의 경우에는 기억이 한 달밖에 유지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그녀의 기억은 한 달을 주기로 매달 리셋됩니다. 전향성 건망증을 앓기 전, 수학을 사랑하는 아이였던 아키야마는 그래서 숫자밖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 그녀가 '나'에게 관심을 보인 건, '나'의 생일과 핸드폰 번호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일과 핸드폰 번호가 친화수라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숫자로 친구를 고른 아키야마 아스나는 '그'를 기억하기 위해 기억이 리셋되고 되고 난 '다음 달의 나'에게 일종의 편지를 써둡니다. 아무도 읽을 수 없게 암호로 적어두는 두툼한 일기장. 이것이 그녀가 기억을 저장하는 방식입니다. 한 달이 지나면 '그'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아키야마 아스나는 자신에게 다가와 생일과 핸드폰 번호를 말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렇게 그가 가진 친화수(생일과 핸드폰 번호)는 아스나와 그를 연결시키는 사랑의 연결고리가 됩니다. 


"아카야마 양은 2라는 숫자를 좋아하는구나."
"응. 고독한 숫자니까. 왜 2가 고독한 숫자인지 알아?"
"소수 중에 유일하게 짝수니까"(83).

아키야마 아스나는 기억이 리셋되는 날을 경계로 다시 타인으로 돌아가 버리지만, '다음 달의 나'와도 친구가 되어 달라는 아스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나'는 그렇게 그녀와 매번 새로운 달을 시작합니다. 그는 멋진 숫자를 가지고 있고, 그녀는 숫자를 사랑하고 있고, 숫자는 영원히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매달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그와 그녀에게는 또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누구와도 친해지려 하지 않았던
'그'가 아키야마 아스나와 엮이기 시작하면서 그가 묻어 두었던 상처가 드러납니다. 그가 누구와도 친해지려 하지 않았던 것은 나름의 속죄였던 것입니다. 한 달이라는 기억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음을 알게 된 아스나는 언젠가 내가 없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 속에서 그녀의 심장이 그의 어두운 상처와 연결되어 있음을 직감합니다. 


나는 그녀의 말대로 2가 고독한 숫자라고 통감하게 됐다.
홀로 있었을 때, 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품은 적이 없었다.
다만 그녀를 알게 된 후 고독을 알게 됐다.
2라는 숫자를 알아버린 사람이 1이 되었을 때 
얼마만큼의 고독을 맛보게 되는지 나는 매달 새삼 절감한다(99).


서로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우게 된 그와 그녀는 "제로가 아닌 이상 도전해볼 만한" 내일을 위해, 약속을 남긴 채, 잠시 이별을 택합니다. 그들은 새끼손가락을 걸며 '서로를, 서로의 심장 고동을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수학의 신 앞에 남겼습니다. 수식으로 연결된 그들의 사랑은 어떤 결말을, 아니 어떤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까요? 

<우리의 새끼손가락은 수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책상 밑에 숨겨 두고 몰래 읽었던 하이틴 로맨스처럼, 한 번 잡으니 손에서 놓을 수 없었습니다. 가볍게 잘 읽혀서 그야말로 '시간 순삭'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입니다. 오랜만에 풋풋한 사랑 이야기에 젖어들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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