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리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6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신인섭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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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문득 신고에게 산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없다. 달은 보름달에 가깝게 밝지만 작은 산 위를 수놓은 나무들의 윤곽은 습한 밤기운으로 희미해진다. 그러나 바람에 움직이지는 않는다. 
……
아득한 바람 소리와 닮았지만 땅울림 같은 깊은 저력이 있었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해서, 신고는 이명인가 싶어 머리를 흔들어보았다. 
소리는 멎었다.
소리가 멎은 뒤에야 비로소 신고는 공포에 휩싸였다. 임종을 알려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오한이 났다(산소리, 20-21).

<산소리>는 일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숨겨진 명작'으로, 그의 작품 중에서도 '만년의 걸작'이라 평가받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그의 이력을 생각하면, 이 작품을 통해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독자로서 조금 민망해지기도 하는데, 그의 작품 속에 담긴 문장의 힘, 문장의 맛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독자를 확보하게 될 것 같습니다. 아무리 글로벌 시대라고 해도 해외 문학에서는 우리네 정서와 다른 생소함과 마주칠 때가 더 많은데, 일본의 문학은 그중에서도 우리네 정서와 닮은 데가 참 많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추리소설의 열풍을 생각하면 확실히 통하는 구석이 있어 보입니다. 

<산소리>는 예순두 살의 '신고'를 통해 하루하루 생을 잃어가는 것처럼 느끼는 노년의 회한을 아주 감각적으로 그려내면서도, 억압된 금기의 욕망을 꿈을 통해 적나라하게 표출시키는 (다소) 몽환적인 소설입니다. 책의 부록으로 실려 있는 '작품해설'을 참고하면, <산소리>는 전후의 일본, 다시 말해 '패전 후'의 일본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한 살 많은 예순셋의 아내 야스코와 살고 있는 신고는 슬하에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고 있습니다. 사실은 소년 시절부터 아내의 언니를 동경했으나 언니 대신 그 동생과 결혼을 했고, 오랜 세월 동안 부부로 함께 살아온 아내의 육체를 보며 노추(老醜)를 느끼는 신고가 아내의 몸에 직접 손을 대는 것은 코 고는 소리를 멈추게 하기 위해 아내의 코를 잡고 흔들 때 뿐이지만, 며느리 기쿠코에게는 더 없이 다정한 시아버지입니다. 외도하는 아들 슈이치의 일에는 적극적으로 나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서도, 딸 둘을 데리고 폐인이나 다름 없는 남편과 이혼하려는 딸 후사코의 문제에 대해서는 손녀 딸린 딸을 다시 떠맡게 될까봐 우울해하는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신고가 최근에 자신이 꾼 음란한 꿈을 떠올려보니 대부분 상대는 소위 천한 여자였다. 오늘 밤의 아가씨도 그랬다. 꿈에서까지 간음의 도덕적 가책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

"앗." 그때 신고의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꿈속의 아기씨는 기쿠코의 화신이 아니었을까? 꿈에도 역시 도덕의식이 움직여서 기쿠코 대신 슈이치의 친구 여동생 모습을 빌린 것이 아닐까? 더구나 불륜을 감추기 위해서, 가책을 감추기 위해서 대역인 여동생을 시시한 여자로 탈바꿈한 것이 아닐까?
만일 신고의 욕망이 원하는 대로 허용되어 그의 인생을 고칠 수 있다면, 신고는 처녀 적의 기쿠코, 즉 슈이치와 결혼하기 전의 기쿠코를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상처 후, 319-320)

<산소리>를 읽으며,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떠올렸습니다. <엄마를 부탁해>가 장성한 자녀의 시선에서 노년의 엄마를 온전한 한 사람으로 이해해가는 과정이었다면, 노년의 시선으로 그려진 <산소리>는 그 '노인'이 바로 '나'라는 충격을 던져주는 듯해서 말입다. 자녀가 노년의 엄마를 찾아가는 과정은 산파적이었다면, 관찰자의 시점에서 시들어가는 지켜보던 그 노인이 바로 나라는 깨달음은 소름끼치는 일격입니다. 스스로를 청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고가 '나'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겠지만, 나이듦의 쓸쓸함을 아는 독자들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이 그려내는 노년의 감각이 징그러울지도 모릅니다. 기묘한 동질감과 반감이 동시에 느껴질 테니까요. 

<산소리>는 읽는 맛이 있는 소설입니다. "
달밤이 깊어져갔다. 깊은 밤이 자욱이 퍼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20). 이런 문장들에 밑줄을 그으며 읽었습니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사실 막장 드라마 같은 내용인데, 음미할수록 순수문학의 아름다움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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