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의 책 표지에는 한 남자가 존재한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다시 책을 돌려 보았는데 표지에 존재하는 남자는 나를 외로운 눈을 하고도 굳건하게 입을 다문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책을 읽기 전의 존재했던 남자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나에게 다가왔다. 소현세자는 아버지인 인조에게 독살을 당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너무나 허무하고도 빠르게 이 세상을 떴다. 그래서인지 소현세자에 관한 이야기는 잘 읽어볼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 책은 나에게 재미있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재미로 읽기엔 책의 한 문장, 한 문장 속에는 먼 타국의 땅에서 조선을 그리워하며 동쪽을 바라본 소현세자의 크나큰 고독을 담고 있었다. 나에게 이 책은 쉬이 읽히는 책이 아니었다. 며칠에 걸쳐 읽어야 했다. 책의 내용이 어렵고 문체가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다음은 어떻게 될까, 도대체 이러한 일을 벌인 자가 누구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책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어느 때는 책장이 잘 넘어갔지만 어느 때는 한 장을 읽고도 책을 덮어야 했다. 읽다 보면 가슴에 무언가가 얹힌 듯이 먹먹하고 무거웠다. 사건의 배후자가 궁금하지만 책의 내용으로 인하여 오히려 저런 궁금한 사항은 눌려서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은 기분이었다. 어찌 보면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난 후에 생각나는 것은 소현세자의 외로움만이 생각날지도 모르겠다. 현재 내 상태가 딱 그 상태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이런 내용도 있었겠지, 하겠지만 현재는 막 책장을 덮었기에 소현세자의 외로움 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소현’은 머리로 읽는 책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은 책이었다. 이 리뷰를 쓰는 지금 이 순간도 가슴 전체가 내려앉은 것 마냥 먹먹하다.
조선의 임금이 이마를 땅에 부딪쳐 항복의 뜻을 전하고 군신의 예를 맺을 때, 소현은 배반하지 않을 것에 대한 아비의 맹세로 볼모가 되었다. 소현은 임금의 아들이었고, 조선의 세자였다. 밝게 빛날 소昭에 나타날 현顯. 죽은 뒤에야 이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될 세자는 적의 땅에서 9년을 머물며, 적이 소멸하는 것을 보는 대신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는 것을 보았다.-12쪽
자, 그러니 꿈을 꿔봐.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금 죽어가는 자에게 살아 있는 마지막 생에서의 꿈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언 바닥에 누운 몸이 온기를 잃어 생의 기억이 함께 차가워지고 있다. 아스라하게 남은 것들 위로는 눈이 쌓였다. 끝없이 흘러 멈추지 않을 것 같던 피도 쌓이는 눈에 묻혀 더는 보이지 않았다. 꿈을 꾼다면 저승의 꿈을 꾸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곳의 꿈은 어떤 것일까.-12~13쪽
"귀를 씻으러 가지 않느냐?"길어지는 침묵, 세자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농으로 물었다. 봉림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적의 땅이 아니옵니까. 적의 물로 씻으니 씻어도 씻어지지가 않사옵니다."오랜만에 세자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자는 그윽한 눈빛으로 아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열이 많아 참는 것이 어려운 성품인 봉림은, 그러나 적의 땅에서 어른이 되었다. 참지 못할 것을 참다 보니, 소망하는 것이 더 뜨거워졌다. 봉림의 그 뜨거운 소망이 세자에게 때때로 위로가 되었다.-57~58쪽
"그 많은 것을 다 먹었더냐?""먹지 못하게 배가 부른 후에는 씹어 내뱉었지요."봉림이 웃었고, 세자가 따라 조용히 웃었다."결기가 네 몸을 해치겠구나.""저하께서만 몸을 보존하신다면, 이딴 몸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그러지 마라. 네가 있어 내가 외롭지 않다."그것은 7년이 흐른 지금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봉림이 없었다면 세자는 지난 7년을 무슨 힘으로 버텼을 것인가.-114쪽
압록강 건너 조선의 땅이 보였다. 눈이 쌓인 듯 나루가 온통 하얬다. 조선의 백성들이 모두 달려 나와 엎드려 세자 저하를 기다리고 있음이었다. 늙은이들의 울음소리가 강을 건너 들렸다. 상께서 민폐를 금하셨으나 민의 마음까지는 금하지 못하심이었다.-136쪽
"내가 백성을 생각한다. 사저를 떠나던 그 순간부터 내가 그러했다. 백성들이 전란에 다치고, 주렸다. 그 피맺힌 울음소리가 한시도 내 귀를 떠나지 않으니 내 살이 아팠다. 내 살을 베어 백성들을 먹일 수 있으면 그리했으리라. 내 목을 내주어 백성들을 살릴 수 있다면 내가 그리했으리라."세자의 어깨가 흔들렸다.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을 거두어주소서, 대죄를 청하듯 말해야 할 것이나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멀리 떠나 있는 아들을 생각할 때도 내가 몸이 아팠다. 베어내지 못하는 살이 붙어 있는 자리에서 아팠다. 내가 너를 생각하면 몸이 더욱 아팠다. 불로 지진 침을 맞아도 그 아픔이 가시지 않았다."임금이 몸을 돌려 누웠다. 여윈 몸의 등뼈가 세자를 향해 드러났다."울거라. 네 몸에 울음이 가득할 것이다."세자에게 울라 하고 돌아누운 아비의 등이 흔들렸다. 상께서 울고 계셨다.-176쪽
그러나 흔이 막금을 내다 버릴 수가 없었다. 막금의 신기가 용해서가 아니고, 같이 흘려주는 그 눈물이 안타까워서가 아니었다. 버려진 곳에서 또 버려지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248쪽
이긴 자와 진 자의 자리가 다르다는 것을, 완전히 굴복해보지 않은 자는 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진 자의 자리는 바닥이 아니라 바닥 아래보다 더 낮은 곳이었다. 더는 내려갈 곳이 없으므로 그 자리가 바로 죽음이었다. 하나의 생이 그때에 끝났고, 또 하나의 생이 그때에 시작되었던 것이다.-314쪽
나는 조선의 세자, 임금의 아들이다-326쪽
역사를 움직인 12명의 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