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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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임금이 이마를 땅에 부딪쳐 항복의 뜻을 전하고 군신의 예를 맺을 때, 소현은 배반하지 않을 것에 대한 아비의 맹세로 볼모가 되었다. 소현은 임금의 아들이었고, 조선의 세자였다. 밝게 빛날 소昭에 나타날 현顯. 죽은 뒤에야 이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될 세자는 적의 땅에서 9년을 머물며, 적이 소멸하는 것을 보는 대신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는 것을 보았다.-12쪽

자, 그러니 꿈을 꿔봐.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금 죽어가는 자에게 살아 있는 마지막 생에서의 꿈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언 바닥에 누운 몸이 온기를 잃어 생의 기억이 함께 차가워지고 있다. 아스라하게 남은 것들 위로는 눈이 쌓였다. 끝없이 흘러 멈추지 않을 것 같던 피도 쌓이는 눈에 묻혀 더는 보이지 않았다. 꿈을 꾼다면 저승의 꿈을 꾸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곳의 꿈은 어떤 것일까.-12~13쪽

"귀를 씻으러 가지 않느냐?"
길어지는 침묵, 세자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농으로 물었다. 봉림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적의 땅이 아니옵니까. 적의 물로 씻으니 씻어도 씻어지지가 않사옵니다."
오랜만에 세자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자는 그윽한 눈빛으로 아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열이 많아 참는 것이 어려운 성품인 봉림은, 그러나 적의 땅에서 어른이 되었다. 참지 못할 것을 참다 보니, 소망하는 것이 더 뜨거워졌다. 봉림의 그 뜨거운 소망이 세자에게 때때로 위로가 되었다.-57~58쪽

"그 많은 것을 다 먹었더냐?"
"먹지 못하게 배가 부른 후에는 씹어 내뱉었지요."
봉림이 웃었고, 세자가 따라 조용히 웃었다.
"결기가 네 몸을 해치겠구나."
"저하께서만 몸을 보존하신다면, 이딴 몸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지 마라. 네가 있어 내가 외롭지 않다."
그것은 7년이 흐른 지금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봉림이 없었다면 세자는 지난 7년을 무슨 힘으로 버텼을 것인가.-114쪽

압록강 건너 조선의 땅이 보였다. 눈이 쌓인 듯 나루가 온통 하얬다. 조선의 백성들이 모두 달려 나와 엎드려 세자 저하를 기다리고 있음이었다. 늙은이들의 울음소리가 강을 건너 들렸다. 상께서 민폐를 금하셨으나 민의 마음까지는 금하지 못하심이었다.-136쪽

"내가 백성을 생각한다. 사저를 떠나던 그 순간부터 내가 그러했다. 백성들이 전란에 다치고, 주렸다. 그 피맺힌 울음소리가 한시도 내 귀를 떠나지 않으니 내 살이 아팠다. 내 살을 베어 백성들을 먹일 수 있으면 그리했으리라. 내 목을 내주어 백성들을 살릴 수 있다면 내가 그리했으리라."
세자의 어깨가 흔들렸다.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을 거두어주소서, 대죄를 청하듯 말해야 할 것이나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멀리 떠나 있는 아들을 생각할 때도 내가 몸이 아팠다. 베어내지 못하는 살이 붙어 있는 자리에서 아팠다. 내가 너를 생각하면 몸이 더욱 아팠다. 불로 지진 침을 맞아도 그 아픔이 가시지 않았다."
임금이 몸을 돌려 누웠다. 여윈 몸의 등뼈가 세자를 향해 드러났다.
"울거라. 네 몸에 울음이 가득할 것이다."
세자에게 울라 하고 돌아누운 아비의 등이 흔들렸다. 상께서 울고 계셨다.-176쪽

그러나 흔이 막금을 내다 버릴 수가 없었다. 막금의 신기가 용해서가 아니고, 같이 흘려주는 그 눈물이 안타까워서가 아니었다. 버려진 곳에서 또 버려지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248쪽

이긴 자와 진 자의 자리가 다르다는 것을, 완전히 굴복해보지 않은 자는 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진 자의 자리는 바닥이 아니라 바닥 아래보다 더 낮은 곳이었다. 더는 내려갈 곳이 없으므로 그 자리가 바로 죽음이었다. 하나의 생이 그때에 끝났고, 또 하나의 생이 그때에 시작되었던 것이다.-314쪽

나는 조선의 세자, 임금의 아들이다-3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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