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이니
배영익 지음 / 네오픽션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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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만든 세계에는 직선이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직선을 긋는 행위야말로 진짜 창조적인 행위다. 직선은 신에게서 해방된 인간성의 상징이다.


연쇄살인사건

인천광역시 옹진군에 있는 덕적도.. 덕적도 주변에서 엉뚱한 변사체들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시신은 모두 세 구가 발견되었는데, 비닐에 싸여서 돌덩이 몇 개와 함께 가방에 담겨 있다. 누군가 살인을 한 후 바다에 유기한 것이다. 다큐멘터리 PD이면서 전직 프로파일러인 류문학 피디가 이 사건을 알게 되고 살인사건의 뒤를 쫒기 시작한다. 당연히 처음에는 아무런 단서가 나오지 않는다. 시신의 손가락은 훼손돼서 지문으로도 신분을 확인할 수 없다. 전직 프로파일러이기 때문에 당연히 환영받지는 못해도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철저하게 시신을 훼손해서 신분을 알 수 없을 것 같았던 시신 중 한 구에서 척추에 인공디스크 수술을 한 것이 확인됐고, 이것을 힌트로 해서 한 사람의 신원은 알 수 있게 됐다. 인공디스크에 새겨진 제품번호로 확인을 해 보면 어디서 수술기록으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다. 외국에서 받은 수술이니 외국에 확인을 해 봐야 하지만 그 정도쯤이야. 게다가 가방 속에 들어 있던 특이한 돌 덕분에 실제 범행이 이뤄진 장소, 즉 가방이 던져졌던 장소도 특정할 수 있게 되었다. 류문학 피디는 이렇게 점점 연쇄살인마를 쫓아 간다.

 

머리에 이런 감투를 쓰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 있었으면 좋겠네.


도깨비 감투

성기담은 거의 인생의 막장까지 와 있다. 아내와는 별거 중이며, 운영하던 학원은 부실한 운영으로 인해 위기에 처해 있는데 은행으로부터 대출도 거절을 당했다. 혹시나 돈을 빌릴 수 있을까 해서 염치는 없지만 장인어른을 찾았다. 장인으로부터 차마 돈 얘기는 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장승과 장승이 머리에 쓰고 있는 감투를 하나 얻어 온다. 여담이지만 성기담은 귀신과 함께 살고 있다. 함께 살고 있다기보다는 귀신이 성기담의 집에 붙어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있다. 어느 집이든 귀신 몇 위 정도 함께 사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 딱히 놀랍지는 않다. 이 귀신은 성기담에게 이런 저런 얘기도 해 준다. 그 중에 사람이 타지 않고 있는데 움직이던 차에 관한 얘기도 있다.


우리는 금세 예상할 수 있다. 장인이 성기담에게 줬던 감투는 도깨비 감투이다. 머리에 쓰면 투명인간이 된다. 이 감투가 어째서 장인 집 허름한 궤짝 속에 있었는지, 장인은 왜 성기담에게 이 감투를 줬고, 이 감투가 도깨비 감투인지 알고 있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어쨌든 굉장한 보물을 얻었다. 안그래도 쫒기던 기담은 도깨비 감투 덕에 사채업자들에게 추적당하는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찾아 보니 의외로 도깨비 감투에 관한 창작품이 많다. 사진은 신문수 화백의 <도깨비 감투>. 굉장히 오래된 만화이다.


도깨비감투와 싸이코패스의 대결

설화 속에 나오는 도깨비 감투가 소재의 하나로 등장하는 미스터리 판타지 소설이다. H. G. 웰즈가 쓴 소설 <투명인간> 이후로 온갖 SF 판타지 소설과 영화의 소재로 숱하게 사용되고 있는 소재이다. 투명인간이 등장한다면 모두들 생각하는 전개가 있다. 목욕탕.. 은행털이.. 히어로가 되어 남몰래 선행을 한다든지.. 이런 기대를 하면서 책을 읽게 된다. 당연히 어려움에 처한 주인공은 투명인간이 되어 시원하게 어려움을 극복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내가 보이니>에서 도깨비 감투를 손에 쥔 성기담을  따라 가다 보면 그런 시원시원한 전개는 물건너가 버린다. 찌질하고 자신감없어 보이는 성기담은 도깨비 감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찌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당황스러운 것은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소재일 것 같았던 도깨비 감투는 사실은 조연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내 생각으로는)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감투를 손에 넣은 성기담이 아니다. 사람들을 죽여서 덕적도에 던져 버린 연쇄살인마가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이다. 성기담과 류문학의 두 사람의 관점을 교차하면서 소설이 진행되는데, 성기담보다는 살인자를 찾는 류문학에게 더 많은 무게가 실려 있다. 그리고 그 싸이코패스 살인마의 정체가 밝혀진 후에는 살인마 vs. 다른 사람들의 대결구도가 긴장감을 자아낸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같은 신비한 물건을 손에 넣은 성기담은 주요 인물을 짚어 나가다 보면 정체를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싸이코패스와 생명을 놓고 사투를 벌이게 된다. 하지만 절대적인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이 대결은 싸이코패스가 승기를 잡아간다. 무적일 것 갓 같은 투명인간이 되는 능력은 교활한 살인마 앞에서는 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살인마는 결국 범죄에 합당한 벌을 받게 되지만 성기담이나 류문학의 활약 때문이라기보다는 욕심 때문에 스스로 무너졌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도깨비 감투는 이 과정에서 인간에게 힘을 부여하는 물건이 아니라 탐욕을 부리는 사람에게 스스로 벌을 주는 심판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의 중요한 두개의 소재는 투명인간과 싸이코패스이다. 하지만 의외로 굉장히 성적이거나 폭력적이지는 않다.


★★★☆


독특한 분위기의 소설이다. 읽기 전에 기대했던 것과는 좀 다른 방향으로 얘기가 전개되는데 나쁘지 않다. 도깨비 감투에 페널티를 부여해서 주인공이 무적이 되지 않은 것은 좋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판타지 소설에서 기대하는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는 어렵다. 대신 싸이코패스 살인마의 성장과정, 행동 등은 설득력이 있어서 긴장감을 느끼며 읽을 수 있었다. 마지막도 상징적으로 잘 결말지은 것 같다.


재미있게 읽었으니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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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ABC - 입문자를 위한 음악 기초 문법 음악의 글 7
이모겐 홀스트.벤저민 브리튼 지음, 이석호 옮김 / 포노(PHONO)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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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공부 언제 해 봤어?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내가 처음 음악에 흠뻑 빠졌던 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었다. 5살이나 6살에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이 좋아서 닥치는대로 음악을 들었던 것이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부모님이 가지고 계시던 카세트 테이프를 내가 더 열심히 듣기도 했었다. 처음으로 좋아했던 클래식음악은 모차르트의 '터키행진곡'이었고, 처음으로 합창을 해 본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 교회 성가대에서였다. 이후로도 아마츄어로서 상당히 많은 음악활동을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한 순간도 음악을 놓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계속 가지고 갈 평생의 취미이다.


음악이 그렇게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론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공부해 본 게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면 고개를 젓게 된다. 학교 다닐 때 배운 것이 전부다. 그나마라도 배운게 큰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조금씩은 음악공부를 해야 했다. 하지만 어차피 아마츄어이고 취미로 하는 음악인데 본격적으로 공부할 틈도 별로 없었고 필요성도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게 당연하다.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는 음악이론은 퍼즐조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직소퍼즐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모겐 홀스트 Imogen Holst 1907~1984 영국의 작곡자, 지휘자, 음악교육자, <음악의 ABC> 저자


본격적인 음악 이론서

음악에 관련된 책은 여러가지가 있다. 가지고 있는 책들을 살펴 보니 당연히 악보가 있고, 음악사에 대한 책, 개별 음악가에 대한 전기, 음악 형식에 대한 책, 음악에 관련한 에세이가 있다. 그런데 꽤 많은 음악 관련 책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초음악이론에 관한 책이 한 권도 없다. 생각해 보니 그런 책을 살 생각을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딱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사실 음악의 기초이론을 모른다고 해서 음악을 듣는데 지장은 없다. 하지만 음악을 듣기만 하는게 아니라 따로 음악 활동도 하고 있어서 간혹 음악이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음악의 ABC>는 그런 면에서 굉장히 큰 도움이 되는 음악 이론서이다. 기본적인 기보법부터 설명을 시작해서 음표의 종류와 박자, 쉼표, 각종 박자지시, 셈여림까지 악보를 읽는 방법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이런 종류의 책을 읽어 본 적이 없어서 학교 다닐 때 음악시간에 배웠던 것들을 되새기면서 읽을 수 있다. 특히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말인 딸림화음이라든지 버금딸림화음같은 용어를 볼 때는 살짝 입가에 웃음이 돌기도 한다. 책의 2/3 가량은 온전히 악보를 읽고 쓰는 방법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어서 악보를 봐야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특히 내가 이 책에서 기대를 했던 부분은 4부의 '대위법' 부분이었다. 음악을 하면서 대위법이라는 말은 참 많이 들었지만, 그동안 잘 찾아 보지도 않았고 제대로 설명을 들어 본 적도 없어서 대강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정확히 뭔지알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약 30페이지의 대위법 부분을 읽어도 다른 부분과는 달리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이해력이 딸려서 그런 건 아닌가 자괴감이 들어서 음악을 전공하는 친구들에게 물어 보니 원래 대위법이 굉장히 어려운 것이고 음대를 다니더라도 작곡과가 아닌 경우에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졸업하는 경우도 많다는 얘기를 듣고는 안심을 했다. '대위법'은 어려운 거다.

 

벤저민 브리튼 Benjamin Britten 1913~1976 영국의 작곡자, 지휘자, 피아니스트, 서문을 썼다.


이론으로 배우는 음악의 역사

책의 나머지 1/3은 여러가지 음악의 형식과 악기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동안 이름으로 들어 왔던 여러가지 춤곡의 형태로부터 소나타, 오페라, 칸타타 및 각종 음악 양식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고 있다. 물론 얇은 부분에서 모든 장르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을 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음악 양식에 대해서 짧은 시간에 한 번 훑어 보고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는 된다. 각 장르에 대해서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더 많은 책을 읽고 음악을 들어 봐야 할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출발점으로 삼기에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음악을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은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음표가 처음에 어떤 모양으로부터 나왔는지도 설명을 하고, 각 장르들이 어떻게 탄생하고 어떤 변천을 겪었는지도 설명을 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음표들, 악기들, 음악 장르들이 어떤 기원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현재의 모습을 띠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음악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사실 음악은 그냥 듣기만 해도 괜찮다. 좋은 음악을 듣는데 꼭 이론적인 지식이 필요지는 않다. 하지만 음악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질 때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좋은 책, 하지만 조금 애매한 포지션

나는 이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도움도 많이 받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책이냐고 물어 본다면 반드시 그렇다고 하기는 좀 쉽지 않다. 이 책은 일종의 교과서같은 책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기는 하지만 이론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딱히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어 보인다. 특히 악보를 볼 필요가 없거나(사실 살면서 악보를 봐야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클래식을 듣지 않는 사람이라면 별로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는 책이다. 그렇다고 전공자에게 읽으라고 하기엔 맛만 보고 끝나는 느낌이 든다. 이 책 이외에도 서양음악의 이론이나 역사에 관한 책을 몇 권 가지고 있는데 그런 책들에 비하면 이 책은 너무 내용이 적다.(부실하다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딱 나같은 사람에게 적당한 책이다. 적당히 음악에 관심이 있어서 내용을 좀 체계적으로 알고 싶은데 시간은 많지 않아서 짧은 시간에 훑어 보고 싶은 사람에게 딱 좋다. 이 책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자고 생각하는 건 욕심이다. 위에서 쓴 것처럼 이 책은 훑어 보고 시작할 수 있는 책이지 완결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음악의 어떤 분야에 대해서 관심이 생겨서 더 이해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딱 좋은 그런 책이다.

 

요즘 고등학교 음악교과서는 이렇게 나오는구나. <음악의 ABC>는 원래도 음악교육을 위한 교과서같은 책으로 쓴 책이다.


★★★★☆


추천할 대상은 명확하다.
1. 아마츄어 음악가 중에서 합창이나 중창, 아카펠라같은 보컬 활동을 하거나 악기를 다루기 때문에 악보를 볼 필요성이 있는 사람
2. 클래식 애호가 중에서 음악을 좀더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사람
3. 프로(여기서 프로는 음대를 준비중인 수험생이나 갓 입학한 학생을 말함) 중에서 음악의 이론을 간단하게 훑어 볼 수 있는 시작점이 필요한 사람


어쨌든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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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나익주 감수 / 와이즈베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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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the ECONOMY, Stupid.' '내가 갑철수입니까?'
장면 1.
1992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공화당의 아버지 부시였고, 재선을 노리고 있었다. 그는 재임 기간 중에 걸프전을 이끌며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은 미국 뿐이라는 것을 전세계에 각인시켰고, 한때 국민적인 지지율이 90%에 달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전쟁은 언제나 국민들을 보수화시키는 경향이 있고, 보수당인 공화당의 재선 대통령 후보인 부시가 4년의 임기를 연장하는 것은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부시의 경쟁자는 아칸소 주지사 출신인 빌 클린턴. 미국 사회는 보수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담론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빌 클린턴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구호로 부시 행정부가 놓치고 있었던 경제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그리고 재선을 노리던 부시를 물리치고 미국의 제42대 대통령이 되었다. 'It's the ECONOMY, stupid'는 미국의 선거 역사상 가장 멋진 구호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보수가 만들어 놓은 담론을 진보의 담론으로 바꾸어 놓은 성공적인 정치 캠페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장면2.
2017년 봄, 박근혜 대통령은 우여곡절 끝에 탄핵되어 대통령의 자리에서 쫒겨나고,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대선이 치뤄지고 있었다. 당시 국민의당 소속이었던 안철수 후보는 인터넷 상에서 'MB 아바타', '갑철수'라는 공격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 와중에 4월 23일 3차 TV토론회가 열리는 날, 안철수 후보는 '제가 갑철수입니까, 안철수입니까?', '제가 MB아바타입니까?'라는 질문을 문재인 후보에게 던진다. 문재인 후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을 했다. 하지만 TV를 시청하던 시청자들은 달랐다. 그 전에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던 유권자들의 머릿속에는 '갑철수'라는 말과 'MB아바타'라는 말이 깊이 박혀 버렸고, 다음날 온라인 포털의 검색 상위권은 '갑철수'와 'MB아바타'가 차지했다. 이후로 한때 지지율 1위까지 차지했던 안철수 후보는 자신이 '갑철수'도 아니고 'MB아바타'도 아니라고 유권자들을 설득해야 했고, 스스로 만든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지지도가 급격히 하락하여 대선 경쟁에서 패배하고 만다. 19대 대선 과정에서 안철수 후보가 저지른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다.
위의 두 장면은 선거 운동에서 프레임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례들이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민주당 후보로서 'It's the ECONOMY, stupid'라는 효과적인 선거 구호로서 아버지 부시를 물리치고 미국의 42대 대통령이 된다.


프레임 이론의 고전
조지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부제 : 진보와 보수, 문제는 프레임이다>를 2004년에 썼다. 햇수로 따져 봤을 때, 이제 겨우 15년밖에 되지 않았다. 이 책이 나오기 전에 프레임이라는 말이 지금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지금은 프레임이라는 말이 사회 전체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특히, 정치권에서는 상대방을 내가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가둬서 담론에 있어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 노력하다. 각 정치세력들이 이른바 '프레임 전쟁'에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프레임을 설명할 때는 반드시 이 책이 언급이 된다. 이제 겨우 15년밖에 되지 않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정치학의 '고전'이라는 영예로운 명칭을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는 제목 단 한 줄로 프레임의 특징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사회의 담론에서 '코끼리'가 주제가 되어 있고, 나는 코끼리에 대한 주제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 때, '코끼리에 대해서 생각하지 마'라고 얘기하는 것은 오히려 더욱 코끼리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코끼리가 하나의 프레임이 되어서 모든 담론이 코끼리를 중심으로 찬성, 반대의 입장을 가지게 되면 내가 원하는 얘기는 할 수 없다. 이 때는 아예 코끼리를 언급조차 하지 않고 다른 주제를 꺼내야 한다. 이것이 프레임을 전환하는 것이다. 위의 예에서 클린턴 후보는 효과적으로 프레임을 전환하는데 성공했고, 안철수 후보는 자신에게 불리한 프레임 속으로 스스로 뛰어드는 꼴이 되었다.

 


조지 레이코프 George Lakoff. (1941 ~ )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진보학자. '은유'에 의해 지배되는 개인의 생각을 파헤쳐 프레임 이론을 전개해 나간다.


보수 : 진보 = 엄격한 아버지 : 자상한 부모
조지 레이코프에 따르면,
사람들은 국가를 하나의 커다란 가정으로 여기고 있다. 국가는 확장된 가정의 한 형태로 책에서는 국가를 가정의 '은유'적 형태로 규정한다. 보수와 진보가 국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모든 요소를 집어 넣고 그 결과를 도출한 후 역으로 그 요소에 맞는 가정을 추론해서 모형을 만들었다. 보수는 국가를 '엄격한 아버지의 가정'으로 생각하고, 진보는 국가를 '자상한 부모의 가정'으로 생각한다. 많이 달라 보이지 않는 이 차이가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엄격한 아버지는 가정을 보호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자녀들에게 옳고 그른 것의 기준을 제시하고 가르친다. 선고 악은 아버지가 판단을 하며 아이들(과 배우자까지)은 아버지에게 순종하여야 하고, 잘못된 길을 걷는 자녀들은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을 받아야 한다. 훈육을 제대로 받은 아이들은 사회에서 성공할 것이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사회로 확장해 보면 사회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가정에서 제대로 훈육을 받은 사람들이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제대로 훈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사회의 성공은 지극히 개인적인(혹은 가정적인) 요인으로 결정이 된다. 사회에서 뒤떨어지는 시민은 훈육을 받아야 할 대상이지 보살핌을 받을 대상이 아니다. 훈육이 없는 보살핌은 시민을 망치고 결국은 사회를 망치게 된다. 여기서 엄격한 아버지는 실제 아버지, 부유한 사람, 백인, 남성, 이성애자, 서양인 심지어는 미국으로 치환될 수 있다. 이것이 보수의 프레임이다.


반면에 진보가 '은유'적으로 생각하는 '자상한 부모의 가정'은 엄격한 부모의 가정과는 모든 면에서 정반대이다. '자상한 부모의 가정'은 가정에 대한 책임이 '아버지'가 아닌 '부모'에게 있다. 성별 중립적이다. 부모의 역할은 훈육보다는 보살핌이다. 그러기 위해서 자녀들에게 감정이입을 해야 하고, 자신과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키워줘야 하며,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을 해야 한다. '자상한 부모의 가정' 역시 사회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 사회는 뒤떨어지는 시민들을 보살펴야 하고, 그들과 공감을 해 나가야 하며 시민들이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할 때에 충분한 보상을 해야 한다. 계급을 만들지 않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진보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바이다. 이것이 진보의 프레임이다.


굉장히 단순화시키고 도식화시켜 놓았기 때문에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이 기준이 모든 사회에서 들어맞지는 않을 것 같다. 특히 우리나라의 상황과는 더욱 더 맞지 않는다. 하지만 어차피 일괄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를 단순하게 만들어 설명하는 방법이 탁월하다.

 


정치에 있어서 어떻게 유리한 프레임을 선점하는지가 갈수록 중요해 지고 있다.


프레임을 차지하기 위한 보수의 전략
당연히 이것은 미국의 이야기이다.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모형으로 볼 때, 보수에는 사회의 기득권층, 즉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포함될 가능성이 많다. 반면에 진보 진영은 보수 진영에 비해서 돈과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의 똑똑한 사람들은 보수주의자가 되지 않았다. 보수 진영은 사회가 진보화되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1970년대부터 보수적인 가치관을 미국에 심기 시작한다. 각종 연구소에 수많은 돈을 쏟아 부어 투자를 하기 시작하고 보수를 돕는 각종 캠페인을 쏟아낸다. 똑똑한 사람들이 점점 보수 진영으로 몰려 들기 시작하고 이들은 '엄격한 아버지'상을 무의식 중에 미국인의 머릿속에 심어 넣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엄격한 아버지' 상을 불어 넣는 것은 정치적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의 은유가 되어 사회 전체는 '엄격한 아버지' 상에 찬성하는 것은 '선'이고, 이에 반대하는 것은 '악'이라는 생각에 빠진다. 저자는 이후 보수 진영에서 개인의 자유와 기업의 지배, 결혼, 테러에 대한 가치관을 보수가 어떻게 자신의 프레임으로 설명하는지 밝히고 있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 현재 미국의 정치 상황이다. 보수가 프레임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진영을 응원하는) 조지 레이코프는 가난한 사람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정책을 펼치는 보수주의자에게 투표를 한다고 설명을 한다. 현재 미국의 정치 상황은 근래 몇 년 동안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수십년 간 보수주의자들이 쏟아부은 노력의 결실이기 때문에 단순히 구호 몇 마디를 바꾸고, 유권자에게 누구에게 투표하는 것이 이익인지를 설명해도 제대로 통하기 힘들 것이라고 충고한다. 프레임을 바꿔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지난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책의 마지막에는 진보가 어떤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언론은 사회의 프레임을 만들어 내는 가장 중요한 매체로서의 역할을 해 왔다.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내용
이 글을 읽으면서 뭔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이 옳다. 나도 그렇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상대방 진영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을 벗어나서 나의 프레임을 담론의 중심에 놓을 것인지, 그 해답(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술)을 찾기 위해서 이 책을 손에 들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은 위에서 제시한 두 개의 예시와 함께 소개되면서 우리나라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상대방의 프레임을 박살내고, 나의 프레임을 만드는 기술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책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미국의 사회에서 보수가 어떻게 자신들의 프레임을 짜 왔으며, 어째서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주의자에게 투표를 하고, 진보는 어떻게 하면 이 프레임을 부수고 정치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찰하는 책이다. 오로지 미국의 정치 지형을 생각해서 쓴 이 책을 통해 프레임에 대해 참고할만한 통찰을 얻을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프레임의 기술이나 전략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 않는다.


사실상 오로지 제목만으로 큰 통찰을 보여 주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 자체가 코끼리를 머릿속에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코끼리라는 말을 자꾸 하려는 상대방의 의도를 무시하고 다른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제목에 담겨 있는 뜻인데, 책의 내용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최근에는 언론보다 SNS가 사회적인 담론의 장으로서 훨씬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유리한 프레임을 형성하려는 정치권에서는 SNS를 장악하기 위해서 굉장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SNS의 특성상 보수 진영보다는 진보 진영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
이 책의 제목이 어째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라는 조지 레이코프의 다른 책이 있다. 읽지 않았기 때문에 내용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 책의 제목이 이 책에 더 어울린다. 추측해 보면 아마도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도 이 책과 거의 같은 내용일 것 같다. 제목이 반은 먹고 들어 가는 책이다. 혹시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제목을 바꾼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영어 원제도 <Don't Think of an Elephant>로 한국어 제목과 같다.


진보와 보수의 출발점을 너무 단순화시켜 놓은 것도 좀 마음에 걸린다. 사회현상을 이해하는데 단순하게 후려쳐서 설명하는 것이 큰 도움을 줄 때도 있지만 너무 도식화된 모형은 모든 현상을 그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억지로 꿰어 맞출 수도 있기 때문에 왜곡된 이해를 불러 올 수도 있다.


위의 두 가지를 감안하더라도 이 책은 좋은 책이다. 이론을 단순화시키는 것은 양날의 검과 같다. 나쁜 점도 있지만 명쾌하게 이해를 돕는 측면도 분명히 있다. 그리고 책을 읽는 중에 미국의 정치상황에 빗대어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을 살펴 볼 수 있는 기회도 될 수 있다. 보수쪽으로 기울어졌던 운동장이 진보쪽으로 기울어진 현재의 우리나라의 정치지형에서 보수와 진보가 어떻게 전략을 펼쳐야 할지 힌트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정말 민주당이 진보인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판단할 바는 아니다) 단, 위에서 밝힌 것처럼 선거전술에 대한 힌트를 얻기는 힘들다. 이 책은 굉장히 장기적인 전략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 특히 정치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참고로 내가 읽은 책은 10주년 개정판인데, 첫 책이 나온 이후에 관한 내용이 굉장히 많아서 세부적인 내용이 첫 책과는 완전히 다른 책인 것 같다.

코끼리는생각하지마,조지레이코프,나익주,유나영,와이즈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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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형제 동화전집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
그림 형제 지음, 아서 래컴 그림, 김열규 옮김 / 현대지성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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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어릴 때 읽었다

언제 읽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읽었던 것 같다. 아마도 제목은 '그림 동화'였겠지. 어릴 때는 한 번 읽은 책을 수도 없이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으니 '그림 동화'도 굉장히 여러 번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용이 기억나는 것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수많은 동화 중에 어떤 것이 '그림 동화'이고 어떤 것이 '안데르센 동화'인지, 아니면 다른 이야기 책에서 읽은 건지 구별을 할 수가 없다. '헨젤과 그레텔'과 '라푼젤'이 '그림 동화'라는 건 확실히 기억을 하고 있다. '그림 동화'에 '신데렐라'와 '백설공주'가 있는 것도 몰랐고,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있는 것도 몰랐다. 어떤 동화가 있는지 기억하지 못한 채 읽기 시작한 <그림형제 동화전집>은 보물창고였다.

 

그림 형제의 동상. 형은 야코프 그림 (Jacob Grimme, 1785~1863) 동생은 빌헬름 그림 (Wilhelm Grimme, 1786~1859)이다. 독일의 법학자, 언어학자. 독일 문학과 옛 관습을 연구하던 중에 신화, 전설, 동화를 모아서 그림동화집을 발간한다.


윤리, 도덕, 개연성 따위는 기대도 하지 마라

<그림형제 동화전집>은 동화다. 나도 어릴 때, 아직 뭐가 뭔지도 전혀 모를 때 이 책을 읽었다. 지금은 성인이 되어버린 내 또래의 많은 친구들이 그랬을 것이다. 지금의 아이들도 나처럼 그렇게 그림동화책을 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아이들이 그런 것처럼 제목에 그림이 있으니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을 거라는 기대와 함께 읽기 시작하겠지. 그런데 말이지... 이 책이 정말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이 맞긴 맞는 건가? 어른이 되어서 다시 읽은 그림동화의 내용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동물들이 나오는 동화에서는 다른 동물들을 잡아 먹기 일쑤다. 공주는 금만 가지고 청혼을 하면 왕자와 사랑에 빠진다. 딸을 얻기 위해서 열두 명의 왕자를 죽이려고 하고, 아이고 어른이고 동물에게 잡아먹힌다. 왕은 아내를 모함한 자신의 어머니를 끓는 기름에 튀겨 죽이고는 왕비와 행복하게 산다. 여기저기서 피가 튀고 사지가 잘라져 나가는 등 끔찍한 장면이 펼쳐진다. 하지 말라는 건 꼭 해서 사고를 치고, 멍청하기 그지없는 주인공들이 주변에 엄청난 폐를 끼치기 일쑤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림형제 동화전집>은 동화다. 아이들 읽으라고 부모가 사주는 동화책에서 어른들이 보기에도 끔찍한 장면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왼쪽은 본책에 삽입되어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아서 래컴 (Arther Rackham 1867~1930, 영국)이 그린 라푼첼 삽화. 오른쪽은 디즈니에서 라푼첼을 소재로 만든 애니메이션. 라푼첼은 그림동화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에 하나이지만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아이들에게는 적당하지 않은 성적인 요소로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동화책이라고 하기보다는 설화집

그림형제는 형 야코프 그림과 동생 빌헬름 그림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처음 그림 형제가 동화집을 펴낸 것은 1812년이라고 한다. 지금으로 따지면 법과대학을 졸업한 법관 지망생인데, 법률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역에 퍼져 있던 설화를 채집했다고 한다. 채집한 49편의 설화를 모아서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집>이라는 제목을 붙서 책을 펴낸다. '그림 동화'의 첫 번째 버전이다. 첫 번째 책 이후 계속해서 판올림을 하고 1857년 제7판에는 모두 210 편의 이야기를 모아 책을 낸다. <그림형제 동화전집>에는 마지막 판에 실려 있던 210편의 동화가 모두 실려 있다.


그러니까 그림동화는 그림형제의 창작한 동화책이 아니고 당시에 떠돌던 설화들을 모아서 적당하게 변형을 해서 쓴 설화모음집이라고 하는게 더 어울린다. 그런데 이 책이 아이가 읽기에는 너무 잔혹하고 내용 전개에 개연성이 없어서 동화라고 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 실제로 처음 그림동화가 출판되었을 때는 최종판보다 더 잔혹하고 성적인 코드가 많이 들어 있어서 판을 거듭하면서 수위를 낮췄다고 한다. (아마도) 어릴 때 이 책을 마르고 닳도록 읽었을 나를 생각해 보면, 딱히 잔혹한 성인이 지는 않았으니 인격형성에 크게 나쁜 영향을 끼치지는 않은 것 같긴 하다. (내가 지금 범죄자가 아니라 다행이다.)

 

영화 신데렐라(2015)의 메인 이미지. 신데렐라는 전세계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그림형제 동화전집>에서 등장하는 신데렐라는 굉장히 투박하면서도 언니들이 신발에 발을 맞추기 위해서 발가락과 발뒤꿈치를 잘라내는 것같은 끔찍한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마녀도 나오지 않는다.


수많은 동화의 원형인 듯한 투박한 이야기

210편의 동화가 담겨 있으니 정말 온갖 얘기가 다 들어 있다. 얼핏 생각나는 유명한 것들만 해도 위에 써 놓은 동화 이외에 '개구리 왕자', '엄지 공주', '작은 빨간 모자', '브레멘 음악대'같은 동화가 담겨 있다. 내용도 가지각색이다. 어떤 것들은 굉장히 교훈적이면서도 권선징악을 제대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너무나도 잔혹하고 악인이 선한 사람들을 등쳐 먹는 이야기도 있다. 동물들이 주인공이 되는 우화도 있고, 정말 개연성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는 막나가는 스토리의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이야기들이 내가 알고 있는 세련된 이야기들이 아니다. 굉장히 투박하다. 이전에 읽으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천일야화>에 비하면 이야기의 구성이 형편없다. 책을 읽다 보면 마치 나무가 빽빽히 들어차서 하늘을 볼 수조차 없는 검푸른 독일의 숲 속을 걷는 것같은 느낌이 든다.


세련되지 않았다는 건, 아마도 많은 이야기들의 원형이 이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적이고 교양있는 사람들이 교훈을 주기 위해서 가필하기 전의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시중에 떠도는 이야기들이 반드시 주류 사회에 바람직한 이야기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림형제 동화전집>을 읽다 보면 시장통에서 사람들이 수군수군대며 하는 얘기들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체면치레하지 않는 거리의 이야기꾼들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막말과 자극적인 표현을 섞어가면서 마구 씨부리는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현대 미디어에서는 훨씬 정교하고 멋진 이야기로 탄생해서 동화책이 되고 애니메이션이 되고 영화가 되겠지만 이대로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책 속의 제목은 <열두 왕자>, 영어 제목으로는 <The Wild Swans>라는 제목의 동화. 마법에 걸려 백조로 변신한 왕자이자 오빠들의 저주를 풀기 위해 막내 공주는 7년 동안 말을 하지 않으면서 오빠들의 옷을 짜야 한다. 왕비가 되어서도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아 마녀로 몰려서 화형을 당하기 직전 백조들이 날아와 막 완성된 옷을 입고 왕자가 되는 모습은 어릴 때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 중에 하나다. 하지만 왕은 왕비를 모함했던 자신의 어머니를 끓는 기름과 독뱀들로 가득한 통 속에 던져 넣어서 고통 속에 죽게 만든다.


★★★★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은 기억을 지니고 사는 건 즐거운 일이다. 어른이 되어서 어릴 때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어릴 때의 기분과 감정으로 되돌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형제 동화전집>을 읽으면서 그런 기분을 느꼈다. 너무 오래전이라서 어렴풋이 단편적으로 기억하고 있던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건 정말 즐거웠다. 더불어서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아서 래컴의 삽화도 굉장히 멋지다. 그림동화니까 멋진 그림이 있는 건 당연하겠지.


이 책을 읽으면서 유일한 문제는 책의 분량이 너무 많은 것이었다. 종이 책 기준으로 1064페이지라서 읽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삽화가 200페이지 가까이 되니 분량이 좀 줄어들지만 그래도 900페이지 가까이 된다. 그래도 슥슥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까지 읽게 된다. 재미있으니까.


어릴 때 그림동화를 읽었던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 번 다시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다. 안 읽어 본 사람이라도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의 1/3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니까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주기엔 좀 꺼려진다. 그런데.. 다들 읽고서도 평범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읽으라고 줘도 큰 상관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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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명 중 98명이 헷갈리는 우리 말 우리 문장
김남미 지음 / 나무의철학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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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만만치 않다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대화는 머릿속에서 바로 만들어낸 문장을 얘기하면 되고(물론 때때로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을 뱉어내는 사람도 있긴 하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 반면에 글은 기록되는 것이고, 파기하거나 삭제하지 않는 한 남아서 다시 읽을 수 있다. 때로는 예전에 써 놓은 글을 읽고서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내가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감탄할 때도 있다. 글은 말과 다르게 기록으로 남는다. 말도 조심스레 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두고두고 읽을 수 있는 글도 잘 써야 한다. 남아서 두고두고 괴롭힐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조건은 여러가지가 있다. 어지러운 글이 되지 않도록 주제를 잘 잡아서 벗어나지 않게 써야 할 것이다. 단락도 적절하게 잘 나누어 놓아야 가독성이 좋다.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을 많이 해 두면 글의 내용을 쓰는데 많은 훈련이 된다. 앞에서 쓴 것들이 내용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전에 먼저 익혀야 할 것이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맞춤법이다. 맞춤법이 틀린 글은 신뢰성이 떨어진다. 문장도 좋아야 한다. 문장이 좋다는 것은 필력이 좋다는 것일 수도 있는데, 이건 내용의 측면에서 문장을 보는 것이다. 형식의 측면에서 보자면 정확한 문장을 써야 한다. 정확하지 않은 문장을 쓰면 내용을 전달할 때 뜻이 바뀔 수 밖에 없다. 글쓴이 김남미 교수는 이 책을 쓰기 전에 <100명 중 98명이 틀리는 한글 맞춤법>을 썼다. 이 책은 저자의 두 번째 책으로 올바른 문장을 쓰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저자 김남미,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졸엄. 현재 서강대학교 글쓰기센터 연구교수.


가볍게 읽기 시작했지만..

이 책은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은 후 서평을 남기든지, 다른 이유에서 쓰든지 항상 끊임없이 글을 쓰랴고 노력하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면서도 얼마나 참고할 것이 많을까 하는 생각도 함께 했다. 정상적으로 고등교육을 마쳤는데, 글의 주제나 구조에 대해서라면 몰라도 문장에서 고칠 것이 굉장히 많지는 않을 것 같았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그랬다. 하지만 항상 자만심은 깨지게 마련이다.

 

한국어는 참 어렵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하지만 어려운 것이 어찌 한국어 뿐일까? 모든 언어는 나름대로 어렵고 단순히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글을 쓰는 것은 더욱 어렵기 마련이다.


문장 구조로부터 시작..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첫 장을 문장 성분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할애한다. 좀 지루할 것 같은 주어, 목적어, 보어, 동사들을 다루는데 잘못 썼을 때 문장이 어떻게 비문이 되는지 찬찬히 생각해 볼 수 있다. 영어를 공부히고 영문장을 쓸 때는 수의 일치, 문장성분같은 문법적인 요소를 문장을 쓰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많이 따진다. 반면에 우리 말을 하고 우리 글을 쓸 때는 이미 모국어로서 체화되어 있는 우리 말의 문법적인 요소는 크게 신경쓰지 않게 마련이다. 비문은 여기서 발생한다. 너무 자신만만해서 소홀히 지나치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쓸 때 최대한 문장을 짧게 쓰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생략을 할 때가 많은데 너무 무리하게 생략하면 내용을 전달하는데 무리가 따를 수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그외에도 글을 쓸 때 좋지 않은 몇가지 버릇이 있는데(주어부가 길어진다든지, '~것이다'라는 강조 표현을 많이 쓴다든지), 첫장이 나의 글쓰기 습관을 되돌아 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2장과 3장은 어휘를 다루고 4장에서는 중의적인 표현을 다룸으로써 우리가 일상적으로 글을 쓸 때에 아무 의식없이 사용하던 잘못된 표현을 예를 들어가면서 다양하게 설명한다. 거의 관용적으로 사용해 오던 말들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생각해 보면 잘못된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런 표현들이 수두룩하게 나오고 글쓴이는 올바른 표현이 어떤 것인지를 친절하게 알려 준다. 첫 장이 총론이라면 나머지 부분은 각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글을 쓸 때 키보드를 많이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글씨체도 나빠지고 점점 글을 쓰는 법을 잊는 것 같아 최근에는 펜(특히 만년필)으로 종이에 글쓰는 연습을 하고 있다. 전자책도 좋지만 종이책이 그립고, 키보드도 좋지만 종이에 쓰는 글씨도 그립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몇 개 배우고 가자

열차가 도착하고 있습니다(X) → 열차가 곧 도착합니다.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O)
잊혀진 계절(X) → 잊힌 계절, 잊어진 계절(O)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X) →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 줘(O)
절 받으세요(X) → 절 올리겠습니다(O)
피로회복제(X) → 피로해소제(O)
나도 이전에는 생각 못했던 표현들인데 책을 읽고 보니 잘못쓰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것들이다.


★★★★

맨 처음에도 썼지만 글을 쓰는 건 참 어렵다. 내용도 생각해야 하고, 문장도 생각해야 하고, 단어도 생각해야 한다. 이 책은 그 중에서 문장과 표현에 대한 조언을 하는 책이다. 어려운 책은 아니다. 가볍게 읽으면서 그동안 아무 생각없이 써왔던 표현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볼 수 있었다. 물론 이 책 하나 읽는다고 해서 문장이 순식간에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의식없이 썼던 글들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 해도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토대로 해서 더 많은 고민을 해야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있겠지. 다른 글을 쓸 때보다 이 글을 쓸 때 신경이 많이 쓰였다. 틀린 문장이 있으면.. 뭐.. 어쩔 수 없지. 기회가 되면 글쓴이가 쓴 다른 책도 읽어 보고 싶다. 그리고 생각만 하고 선뜻 손에 들지 못하고 있는 이오덕 선생님의 <우리 글 바로쓰기> 세트도 읽어 봐야 할 것 같다.


가볍게 읽으면서 글쓰기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고 도움도 받을 수 있는 책이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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