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리 선생님은 도대체 무슨 병이냐고. 도망치는 병이라고 그러대. 그땐 최 선생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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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세탁부의 다음 말은 통렬하게 가슴을 찔렀다.
"세상에서 도망치는 병이야. 자기한테서도 도망치는 병이고. 그
렇지?" - P291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를 얻어 세상에 돌아가면 희망 대신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세상 속에서 이룰 것이 없다는 진실. - P292

그 순간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아아, 저 미친 새끼. - P310

승민은 산책을 하러 나온 게 아니었다. 귀환이 보장된 길도 아니었다. 귀환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은 마지막 비행에 나선 길이었다. - P319

"어쩔 수 없을 때도 있어. 살다보면, 가끔." - P321

나는 진실에 얻어맞아 고꾸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진실은 내가 겁냈던 것만큼 거인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 P325

"이수명 씨는 류승민 씨의 죽음을 인정하나요?"
나는 잠자코 있었다. 승민은 내게 죽음이나 삶으로 분류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승민 자체로 존재했다.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 기억이나 실체 같은 개념이 가닿지 않는 어떤 차원이기도 했다. 나는 거기에 맞는 이름을 찾아내지 못했다. - P331

‘운명이 내 삶을 침몰시킬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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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또 자작나무 숲에 있었다. 처음처럼 길을 잃지도 않았고 가로등처럼 매달린 머리들을 보지도 않았다. 쇠사슬이 감긴 철망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을 뿐이다. 밤하늘이 수리호 수면 위로 내려와 있었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 P240

지난밤에도 김용은 샤워장 바닥이 아니라 승민의 혓바닥에 자빠져 허리를 다친 것이리라. 수간호사 자빠뜨리기야 일도 아니었겠지. - P252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이렇게 이해력이 달려서야. 내 의사가 점박이의 멍청한 머리에 쑥박히도록 손가락을 말뚝처럼 세웠다. 엿 먹으라고, 엿, 엿 몰라? - P260

승민은 보호사나 진압 2인조에게 소리치는 게 아니었다.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자신을 조준하고 있는 세상의 총구들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내 심장을 쏘라고. 그래야만 나를 가둘수 있을 것이라고. 직감은 불길한 예언을 내놓았다. 이놈은 스스로죽을 거야. - P264

"비켜!"
왜 하필 ‘비켜‘였던가. 모르겠다. 그 순간 내 몸을 꿰뚫었던 것이 무언지만 안다. 통쾌함이었다. 해방감이었다. 깨달음이었다. 내 심장도 승민처럼 살아 있었다. 흉곽 속에서 아프게 요동하고 있는 것은 분명 내 심장이었다. - P268

납굴이 뭔지는 몰라도 어떤 상황인지는 알 것 같았다. 한이는 제 몸을 통제할 의지마저 버린 것이었다. 납으로 만든 인형처럼, 타인이 조작하는 대로 움직이는 몸이 그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냐. 그게 아니라면, 버린 육신 안에 꿈의 지대를 만들어놓고 그곳으로 피신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 P280

"난 잘 모르겠다. 너로 존재하는 순간이 남은 인생과 맞바꿀 만큼 대단한 건지." - P286

"난 순간과 인생을 맞바꾸려는 게 아냐. 내 시간 속에 나로 존재하는 것, 그게 나한테는 삶이야. 나는 살고 싶어. 살고 싶어서, 죽는 게 무서워서, 살려고 애쓰고 있어. 그뿐이야."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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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천일야화>의 흥미진진한 이야기 세계에 빠져들지 않은사람이 어디 있으랴. - P5

중동신화여행은 문자를 포함한 그 모든 기록을 통해 인류 최초의 기억을 찾아가는 여행이다. 우리는 물론 안다. 어제의 그 기억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오늘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슬픔은 그만큼 더 커진다는 사실을. - P7

세계 도처에서 일제히 무엇을 하느냐 하면, 신을 섬기는 것을 구조화하고 형상화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이런 것들을 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불가사의한 인간 문제의 해결 방식을 흔히 초연적인 거대함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 P24

도시의 등장은 인류 문명의 중요한 발전 가운데 하나로, 무엇보다 도시는 규격화되어 있다는 게 특징입니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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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었다. 밤마다 들려오던 구두소리를 그날 밤엔 끝내 들을 수가 없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아무도 와보지 않는 병원이 있다니. - P203

"정신병동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어요.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 자." - P213

폭풍이 오던 밤, 치명상을 입은 건 승민의 시력만이 아니었다. 말, 풍부한 표정, 분노, 유머, 활기, 뻔뻔함, 웃는 눈. 녀석을 설명하는 특징들이 다 사라졌다. 승민은 자신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돌아온 것이었다. - P224

"네 엄마한테 가서 전해. 내가 웃더라고."
승민은 웃음을 그쳤다.
"눈치껏 죽어주지도 않을 것 같더라고. 난 여기서 오래오래 살 생각이거든."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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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은 혼자 핏대를 올리고 있었다.
"유원지 때문에 가장 피 보는 건 우리야. 정기적으로 청소 나가야지, 야밤까지 시끄럽지. 재작년부터는 글라이딩 하는 애들까지 몰려들어서 겨울에도 조용한 날이 없다니까." - P154

나는 허둥거렸다. 가슴 밑바닥에서 낯선 충동이 일고 있었다. 숲의 그늘을 벗어나 댐 비탈로 나가고 싶은 충동. 금빛으로 익어가는 옥수수들처럼, 막 타오르기 시작한 태양 아래 서고 싶은 충동. - P157

사람들 역시 꼼짝하지 않았다. 백일몽에 빠진 듯한 시선들이 제각기 다른 곳을 더듬고 있었다. 무엇을 더듬는지 궁금했다. 저들도 나와 같은 걸 느꼈는지 궁금했다. 그랬다면 그 통증에 대한 진단을 내릴 수 있으리라.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 혹은 기억이 가져다준 ‘쓸쓸함‘ 이라고. - P159

‘인격적 대우‘의 보편적 의미가 상대를 존중하는 행동방식이라면, 정신병원적 의미는 물리적 수단을 쓰지 않고 환자를 통제하는 방식을 의미했다. - P166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승민은 많은 걸 할 줄 아는 놈이었다. 춤을 출 줄 알고, 노래를 부를 줄 알고, 근사한 목소리를 낼 줄 알았다.
자신이 가진 걸 온전히 누릴 줄 알았다. 무엇보다 놈에게서 터져 나오는 강렬한 에너지에 압도당한 기분이었다. - P174

한이는 백합방으로 갔다. 보호사가 꽂은 주사에 정신을 잃고 이동침대에 실려 갔다. 이는 병원의 문제 해결방식이었다. 당사자가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방식.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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