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베에서 중앙으로 진출한 왕족은 새롭고 참신한 왕위계승 정책을 실시했다. 임금이 죽기 전에 태자를 왕위에 올리는 것이다. 섭정의 성격이 강하지만, 공식적으로는 두 임금이 함께 다스리는 것이다. - P163
중왕국의 피라미드는 고왕국처럼 돌로 지은 것이 아니라 흙벽돌을 쌓은 것이다. 흙벽돌을 쓴 이유는 비용 때문인 듯하다. 멀리 채석장에서 돌을 잘라 운반하는 것보다 햇볕에 말려흙벽돌을 얻으면 훨씬 간단하고 저렴했기 때문이다. - P171
힉소스는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 혼종이다. 다만 시리아-팔레스티나계가 주도했던 것 같다. - P177
힉소스는 이집트에 동화되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마치 이집트식으로 모든 것을 맞춘 듯했다. 임금의 이름에는 전통의 태양신 이름을 썼고, 종교에서도 레 신앙을 권장했다. - P180
아흐모세(Ahmose)가 기원전 1530년경 마침내 아바리스를 점령하고 다시금 이집트를 통일했다. 그리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으니 18왕조였다. 이집트는 통일국가의 가장 빛나는 시대를 예고했다. - P184
히타이트와 소국들이 맺은 조약문들은 작은 존재가 큰 나라의 대왕에게 충성을 표시하는 내용이고 문학적 형식도 거의 일관되어 있다. 이런 조약문의 문학적 형식이 모세오경을 마무리하는 신명기의 문학형식과 일치한다는 관찰이 널리 수용된다. - P196
밋탄과 아시리아는 숙적이었다. 양자 모두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위치했기에 밋탄이 강성할 당시에 아시리아는 밋탄에 조공을 바쳐야 했고 아시리아가 흥하면 밋탄은 위축되어야 했다. 그들사이에 대국과 소국의 운명이 교차했다. - P203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소국들이 이집트로 보낸 편지가 엘-아마르나 문서(EA)에 퍽 많이 남아 있다. - P209
아시리아는 무력이 강해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웠지만, 바빌로니아는 약체였는데도 문화의 힘으로 명성이 높았다. - P211
아시리아는 대국 밋탄도 물리쳤고 주위 소국들도 평정했지만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과정이 지난했다. 한편 바빌로니아는 아시리아에도 점령당했고소국 엘람에도 무릎을 꿇었지만 대국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바빌로니아의 무기는 무엇보다 말과 글이었다. - P214
카모세의 동생 아흐모세가 기원전 1530년경 아바리스를 점령하고 새롭게 시작한 나라가 18왕조였다. - P218
여성 파라오 핫솁수트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왕위를 찬탈했고 비범한 탄생설화를 퍼뜨렸다. 거대한 왕국 이집트를 잘 다스렸고 원정에도 성공적이었다. 성공한 파라오였지만 후대의 기억에서는 체계적으로 지워졌다. - P228
이집트의 2만 대군에 맞서 카데쉬를 수호해야 하는 무와탈리 2세는 히타이트의 봉신국가들에서 차출한 연합군으로 3만 5천의 부대를 꾸렸다. - P248
기원전 2천년대에 쓰인 아카드어 ‘하비루‘(habiru 또는 hapiru)는 ‘강도(떼)‘, ‘쫓겨난 사람들‘, ‘무법자‘, ‘달아난 노예들‘ 등을 의미했다. 인종이나 부족의 이름이 아니라 "경멸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는 사회적 보통명사"다. - P259
이스라엘은 하비루들이 세운 첫째 나라가 아니었다. 12세기의 파괴와 단절 이전에 이미 하비루의 나라를 세운 인물이 있었다. 기록상의 첫째는 이드리미 (Idrimi, 기원전 1460-1400년)였다. - P260
고대근동인이라면 히브리인들의 야훼를 작은 신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하비루의 작은 신에 불과한 존재가 이집트의 파라오를 이기고 백성을 탈출시켰다는 서사는 놀랍다 못해 차라리 황당했을 것이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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