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백씨는 채응규가 정말 남편이 맞는지 아닌지를 가리는 데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채규가 사라졌을 때 유연을 살인자로 무고하는 일에 더 적극성을 보였다. - P231
아버지의 상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게 된 유유는 부인 백씨를 잠깐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지난날 백씨가 채응규를 자신으로 여겨 동생을 죽게 했다며 힐난하였다. - P231
유유의 출현은 이러한 위기로부터 그녀를 지킬 수 있었다. 그녀로서는 평소 사이가 나빴던 남편의 진위보다 그의 출현 자체가 중요했을 수도 있다. 남편이 가짜일 수도 있었지만 백씨는 직접적인 판단을 미루었다. - P235
유예원의 딸은 모두 세 명으로 각각 이지, 하항, 최수인과 혼인하였다. 족보에는 이 가운데 맏딸과 사위 이지가 완전히 빠져 있다. - P238
유유의 생존 사실을 확인하고 사건 재조사의 물꼬를 튼 윤국형은 세상일이란 실상을 알기 어려울 수가 있으므로, 자신의 자손들 가운데 옥사를 맡는 이가 있으면 이 일을 거울삼아 경계하라고 당부하였다. - P244
국가 차원에서 종법에 대한 논의는 16세기 전반 중종 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은 연산조의 폐해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예제의 정비에 관심을 가졌다. 종법의 시행 역시 이러한 관심의 연장선에 있었다. - P255
종법은 이를 주도한 인물이 가문별로 존재하였고, 시행 과정은 개별 가문이 처한 조건에 따라 달랐던 것이다. - P258
종법이란 적장자로 이어지는 가계 계승의 이상을 실현하고 종손에게 가계의 주요한 의례, 특히 제사의 권한과 책임을 맡기는 것이었다. - P259
1548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 아르티가의 농민 마르탱 게르는 아내와 아이를 남겨 두고 집을 떠났다. 유유가 가출하기 8년 전의 일이니, 두 인물은 동시대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성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마르탱 게르는 결혼 뒤 8년이 지나서야 아이를 얻을 수 있었다. - P287
돌아온 유유는 끝내 그녀와 화해하지 않았다. 자식이 없었고 양반 부인으로 재혼을 할 수도 없었던 백씨는 아마도 친정에서 받은 상속 재산으로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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