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나는 또 자작나무 숲에 있었다. 처음처럼 길을 잃지도 않았고 가로등처럼 매달린 머리들을 보지도 않았다. 쇠사슬이 감긴 철망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을 뿐이다. 밤하늘이 수리호 수면 위로 내려와 있었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 P240

지난밤에도 김용은 샤워장 바닥이 아니라 승민의 혓바닥에 자빠져 허리를 다친 것이리라. 수간호사 자빠뜨리기야 일도 아니었겠지. - P252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이렇게 이해력이 달려서야. 내 의사가 점박이의 멍청한 머리에 쑥박히도록 손가락을 말뚝처럼 세웠다. 엿 먹으라고, 엿, 엿 몰라? - P260

승민은 보호사나 진압 2인조에게 소리치는 게 아니었다.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자신을 조준하고 있는 세상의 총구들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내 심장을 쏘라고. 그래야만 나를 가둘수 있을 것이라고. 직감은 불길한 예언을 내놓았다. 이놈은 스스로죽을 거야. - P264

"비켜!"
왜 하필 ‘비켜‘였던가. 모르겠다. 그 순간 내 몸을 꿰뚫었던 것이 무언지만 안다. 통쾌함이었다. 해방감이었다. 깨달음이었다. 내 심장도 승민처럼 살아 있었다. 흉곽 속에서 아프게 요동하고 있는 것은 분명 내 심장이었다. - P268

납굴이 뭔지는 몰라도 어떤 상황인지는 알 것 같았다. 한이는 제 몸을 통제할 의지마저 버린 것이었다. 납으로 만든 인형처럼, 타인이 조작하는 대로 움직이는 몸이 그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냐. 그게 아니라면, 버린 육신 안에 꿈의 지대를 만들어놓고 그곳으로 피신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 P280

"난 잘 모르겠다. 너로 존재하는 순간이 남은 인생과 맞바꿀 만큼 대단한 건지." - P286

"난 순간과 인생을 맞바꾸려는 게 아냐. 내 시간 속에 나로 존재하는 것, 그게 나한테는 삶이야. 나는 살고 싶어. 살고 싶어서, 죽는 게 무서워서, 살려고 애쓰고 있어. 그뿐이야."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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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천일야화>의 흥미진진한 이야기 세계에 빠져들지 않은사람이 어디 있으랴. - P5

중동신화여행은 문자를 포함한 그 모든 기록을 통해 인류 최초의 기억을 찾아가는 여행이다. 우리는 물론 안다. 어제의 그 기억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오늘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슬픔은 그만큼 더 커진다는 사실을. - P7

세계 도처에서 일제히 무엇을 하느냐 하면, 신을 섬기는 것을 구조화하고 형상화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이런 것들을 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불가사의한 인간 문제의 해결 방식을 흔히 초연적인 거대함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 P24

도시의 등장은 인류 문명의 중요한 발전 가운데 하나로, 무엇보다 도시는 규격화되어 있다는 게 특징입니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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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었다. 밤마다 들려오던 구두소리를 그날 밤엔 끝내 들을 수가 없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아무도 와보지 않는 병원이 있다니. - P203

"정신병동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어요.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 자." - P213

폭풍이 오던 밤, 치명상을 입은 건 승민의 시력만이 아니었다. 말, 풍부한 표정, 분노, 유머, 활기, 뻔뻔함, 웃는 눈. 녀석을 설명하는 특징들이 다 사라졌다. 승민은 자신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돌아온 것이었다. - P224

"네 엄마한테 가서 전해. 내가 웃더라고."
승민은 웃음을 그쳤다.
"눈치껏 죽어주지도 않을 것 같더라고. 난 여기서 오래오래 살 생각이거든."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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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은 혼자 핏대를 올리고 있었다.
"유원지 때문에 가장 피 보는 건 우리야. 정기적으로 청소 나가야지, 야밤까지 시끄럽지. 재작년부터는 글라이딩 하는 애들까지 몰려들어서 겨울에도 조용한 날이 없다니까." - P154

나는 허둥거렸다. 가슴 밑바닥에서 낯선 충동이 일고 있었다. 숲의 그늘을 벗어나 댐 비탈로 나가고 싶은 충동. 금빛으로 익어가는 옥수수들처럼, 막 타오르기 시작한 태양 아래 서고 싶은 충동. - P157

사람들 역시 꼼짝하지 않았다. 백일몽에 빠진 듯한 시선들이 제각기 다른 곳을 더듬고 있었다. 무엇을 더듬는지 궁금했다. 저들도 나와 같은 걸 느꼈는지 궁금했다. 그랬다면 그 통증에 대한 진단을 내릴 수 있으리라.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 혹은 기억이 가져다준 ‘쓸쓸함‘ 이라고. - P159

‘인격적 대우‘의 보편적 의미가 상대를 존중하는 행동방식이라면, 정신병원적 의미는 물리적 수단을 쓰지 않고 환자를 통제하는 방식을 의미했다. - P166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승민은 많은 걸 할 줄 아는 놈이었다. 춤을 출 줄 알고, 노래를 부를 줄 알고, 근사한 목소리를 낼 줄 알았다.
자신이 가진 걸 온전히 누릴 줄 알았다. 무엇보다 놈에게서 터져 나오는 강렬한 에너지에 압도당한 기분이었다. - P174

한이는 백합방으로 갔다. 보호사가 꽂은 주사에 정신을 잃고 이동침대에 실려 갔다. 이는 병원의 문제 해결방식이었다. 당사자가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방식.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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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정녕 나를 버리시나요. - P63

"병원은 무법천지가 아냐. 대리인이 입원시키는 경우는 없어."
"이보세요, 최기훈 선생님. 당신 눈앞에 있잖아요. 댁이 가족이라고 우기면 가족이 아닌데 가족이 됩니까? 난 호적상 가족과 마주 앉아서 얘기를 하고 싶다고요." - P65

"수명아."
승민의 팔이 뒤에서 목을 감아왔다.
"오빠가 그렇게 좋아?"
나는 놀라서 목을 빼려 했으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P83

나는 샌드백이 있는 창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특별한 매력을 가진 자리였다. 이틀 전 우연히 발견한 사실인데 창살 하나가 정상이 아니었다. 무심코 잡았더니 흔들흔들했고, 슬쩍 당겼더니 구멍에서 쑥 빠졌다. - P85

모 정신의학자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라이터는 이런 사람이다. 소방서를 물 먹이며 광범위한 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는 불놀이 선수. 병동 주민들은 라이터를 사이코패스의 범주에 넣는다. - P94

승민은 아침부터 수간호사를 달달 볶았다. 보호자가 수요일 오후에 퇴원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원장 사인이 든 퇴원 서류도 봤다. 오늘이 목요일이다. 어떻게 된 일이냐. 수간호사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퇴원 오더를 받은 바 없다. - P106

이상한 배신감을 느꼈다. 최기훈은 적어도 점박이보다 나은 줄 알았다. 공정한 사람인 줄 알았다. 따지고 보면 근거 없는 생각이었다. - P117

"그놈은 미치광이야."
십운산 선생이 모처럼 상대를 적시한 점괘로 말잔치를 정리했다.
"미치광이는 미쳐야 사는데, 못 미치게 하니까 미쳐버린 거야."
왕자, 개망나니, 유학생, 못 미치게 해서 미쳐버린 미치광이. 승민은 누구일까. - P130

지난 토요일에야 렉터 박사가 류재민이 속내를 확인시켜 주더라. 방화광은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가진 자고, 반사회적 인격 장애는 도덕의 정신병이며 치료법은 영원한 격리뿐이라고. 난 웃었어. 하도 암담하니까 웃음밖에 안 나오데. 난…."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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