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루티드
나오미 노빅 지음, 오정아 옮김 / 노블마인 / 2017년 12월
평점 :
품절


2016년 네뷸러 상을 받은 작품


마법사 영주에게 잡혀간 말괄량이 소녀, 마녀가 되다
아그니에슈카는 폴니아 왕국의 드베르닉이라는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드베르닉은 우드라는 저주받은 숲으로부터 약 11km 정도 떨어진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먼 산등성이에는 하얀 분필을 닮은 탑이 하나 서 있다. 그 탑에는 이 지역의 영주이면서 폴니아 왕국 최고의 마법사인 드래곤이 살고 있다. 드래곤은 10년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와서 17세 소녀를 데리고 간다. 물론 '드래곤은 자신이 데려가는 소녀를 잡아먹지 않는다.' 도대체 왜 데려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10년 후 마을로 내려온 소녀들은 모두 마을을 떠나 버린다.


항상 얘기는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법이다. 우리의 주인공 아그니에슈카는 17살 소녀이고, 때마침 드래곤이 내려와서 소녀를 데리고 가는 바로 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 영주가 드래곤이라고 해서 우리가 상상하는 용은 아니다. 이름이 드래곤이다. 마법사로서는 샬칸이라는 멋드러진 별칭도 있다. 드래곤이 마을에 내려왔다. 마을에는 누가 봐도 예쁘고 드래곤에 꼭 마음에 들만한 카시아가 있다. 아그니에슈카의 단짝 친구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드래곤이 카시아를 데리고 갈 거라고 생각했고, 카시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드래곤은 카시아를 데려가지 않았다. 그렇게 아그니에슈카는 얼떨결에 드래곤을 따라 가고, 성에서의 생활이 시작한다.

 

작가인 나오미 노빅 Naomi Novik (1973 ~ ) 뉴욕 출생. 전작으로 데메테르라는 8권짜리 장편 판타지 소설이 있다.


가상의 중세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마법 판타지
SF 소설은 많이 읽지만 판타지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는다. 둘 다 장르문학이면서 현실이 아닌 새로운 세계를 상상력으로 창조해서 스토리를 짜나간다. SF는 과학이 발전한 미래를 대상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면, 판타지는 마법이 있을 것 같고, 인간 외의 종족이 있었을 것 같은 고대나 중세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결국은 세계 자체가 작가의 머릿속에서 만들어 지기 때문에 소설의 세계관이 질서있고 설득력이 있어야 읽는 사람도 몰입을 해서 읽을 수가 있다.


업루티드의 배경은 어딘가에 있었을 것 같지만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 중세유럽의 폴니아 왕국이다. 왕도 있고, 다른 나라의 왕자와 도망쳐서 20년간 행방불명이 된 왕비도 있다. 왕자와 마법사, 마녀가 등장한다. 마법이 난무하고 주문도 등장한다. 굉장히 익숙하고, 판타지라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배경이다. 이해하기 쉽고 무난하다. 한가지 특이한 설정이라면 왕국의 한쪽에 우드라고 하는 악한 숲이 있어서 왕국과 경계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드래곤은 우드의 경계와 가까운 곳에 살면서 우드가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막고 있다.

 

소설의 전반부를 지배하는 이미지는 어둡고 저주받은 숲이다.


온갖 사건에 휘말리는 좌충우돌 초보마녀
아그니에슈카는 드래곤이 사는 성에 가서 처음에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거나 음식을 만드는 생활마법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우드의 저주로부터 마을을 지켜내기도 하는 등 활약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격이 차가운 드래곤과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는 않다. 드래곤은 아그니에슈카가 마법을 제대로 배우지는 않고 따지고 드는 것이 못마땅하다. 어느날 아그니에슈카가 전설의 마법서인 '야가의 마법서'를 사용하는 것을 본 드래곤은 깜짝 놀란다. '야가의 마법서'는 그동안 아무도 활용을 못했던 마법서였기 때문이다. 알고보니 아그니에슈카는 천재 마녀였을지도 모른다. 주인공이니까..


이후 아그니에슈카는 어설픈 마법으로 우드로 납치된 카시아를 구출해 내고 우드의 저주에 먹힌 카시아를 마법으로 치료한다. 이 소식은 왕자인 마렉의 귀에 들어가서 또 함께 우드에 들어가서 20년전 납치되었던 왕비까지 구출한다. 그리고 왕궁으로 가고.. 다른 마법사들을 만나고.. 재판을 받고.. 마녀 인증을 받고.. 우드의 계략에 의해서 왕이 죽고.. 마렉의 형인 왕세자도 죽고.. 여러가지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아그니에슈카는 카시아, 왕비와 함께 성으로 가서 마녀로 인증을 받게 되고, 수많은 사건을 겪게 된다.


마법사와 마법에 대한 새로운 느낌
업루티드에서 마법사는 오래 산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 것 같다. 궁정마법사인 알로샤 역시 마녀였기 때문에 백년을 넘게 살아 왔다. 중간에 아그니에슈카와 잠깐 마녀의 삶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데, 알로샤는 자신의 고손자 얘기를 한다. 무려 67명의 고손자가 있는데, 이제는 자신의 자손인지 모르는 고손자도 생겼다고 한다. 오래 산다는 것, 잊혀진다는 것, 나이가 들어 감정이 무뎌진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 봤다. 소설의 뒷부분에서는 드래곤은 아그니에슈카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 판타지에서 이렇게 성행위를 묘사하는게 일반적인가? 100살 차이가 나는 연인이다. 나이가 먹으면 감정이 무뎌지는 것.. 역시 주인공은 예외다.


마법은 입으로 주문을 외우면 몸속의 마법이 '흐르는 것'으로 표현을 했다. 주문을 정확히 외워야만 제대로 된 마법이 흐르고 주문을 정확히 외우지 않으면 마법이 꼬여서 무너지게 된다. 마법에 대한 이런 표현은 RPG 게임에서의 '마나', 무협소설에서의 '내공'같은 느낌으로 쓰인 것 같다. 마법에 대해서 뭔가 실체가 있는 기의 흐름처럼 표현을 해 놓았다. 마나든 내공이든 항상 사용하면 소진되는데, 업루티드에서도 마법을 사용하면 기력이 소진되는 것으로 표현한다.

 

아그니에슈카는 마녀다. 천재 마법소녀일지도..?


밀도가 낮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느낌
다시 말하지만 나는 판타지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 봤기 때문에 이 소설이 '좋은 판타지 소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소설이 '재미있는 소설'이냐고 물어 본다면 좀 멈칫할 수밖에 없다. 배경은 무난하다. 나같은 초보 독자도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다. 내용이 어렵지도 않다. 쉽게 슥슥 읽을 수 있다. 문제는 전체적으로 밀도가 낮고 구멍이 숭숭 뚫린 듯한 느낌이 든다. 한 권짜리 소설로는 꽤 길이가 긴 670페이지짜리 소설이다. 그런데 읽는 동안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드래곤과 아그니에슈카가 처음 관계를 맺으려다 포기하는 부분도 그렇고 실제 관례를 맺는 부분도 그렇다. 그다지 감정적인 교감이 이루어진 적이 별로 없는데 뜬금없이 일을 벌이는 것 같았다.


왜 그런가 생각을 해 보니 사건이 시작되고 마무리되고 다음 사건으로 넘어갈 때 개연성이 너무 부족해 보인다. 제일 처음에 드래곤이 아그니에슈카를 선택한 장면부터 왜 아그니에슈카가 선택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마법은 아직 쥐뿔도 모르면서 아무 생각없이 우드로 쳐들어가서 카시아를 구출해 오는 장면도 그냥 운이 너무 좋다고 하기엔 어색하다. 뭔가 설명이 더 있어야 하는데 설명을 하다가 만 듯한 느낌이다.

 
캐릭터도 정돈이 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분량에 비해서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인물들의 성격이 뚜렷해 보이지 않아서 캐릭터에 대해서 애정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아그니에슈카는 실수투성이 천방지축 마법소녀이고, 드래곤은 쉽게 볼 수 있는 엄격해 보이지만 속은 따뜻한 마법사인 건 알겠다. 하지만 다른 캐릭터들은 영 뒤죽박죽이어서 행동에서 개연성을 느끼기 쉽지 않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인물들을 생각했을 때 어떤 사람이었는지 머릿속에 명확히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는다.


도대체 왜 그럴까? 나는 작가의 이전 소설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전 소설은 읽어 본 것은 아닌데 무려 8권짜리 소설이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꽤 히트를 쳤다고 한다. 그렇게 긴 장편이라면 인물들이나 사건들을 세세하게 설정하면서 설득력있게 끌고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비록 길다고는 해도 업루티드는 한 권짜리 소설이다. 솜씨좋게 인물과 사건을 처리하기엔 분량이 너무 적었던게 아닌가 싶다.


장르소설을 읽고 나면 보통 그 소설 속에 나온 인물 중에 한 명(주로 주인공이겠지만)에게 굉장히 애정을 갖게 마련인데, 업루티드를 다 읽고 나서도 애정이 가는 인물이 없었다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문제로 느껴졌다.

 

외국판 표지. 가운데 아그니에슈카를 중심으로 카시아, 드래곤, 팔콘 등이 보인다.


이거 약간 애매하다
670페이지짜리 책을 대략 7~8시간 정도에 읽었으니 일단 책을 술술 읽을 수 있다. 지루하지는 않다는 얘기다. 중세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가 어떤 모습인지도 알겠다. 이런 소설에서 등장할 법한 여러가지 사건도 등장하고 숲과 마법사가 대결하고 숲에 끌려 들어갔다 나온 사람은 껍데기만 남는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그런 면에서는 읽어봐도 좋다고 추천을 해도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뒤에서 쓴 것처럼 왠지 좀 어수선한 느낌이 든다. 소설을 읽는 내내 정돈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사건은 많이 터지는데, 긴장감이 들지 않고 밋밋하다는 느낌이다. 온갖 재료를 다 섞어서 보기에 좋은 탕을 끓여 놓았는데 재료가 따로 놀고, 결정적인 맛 하나가 빠진듯한 그런 느낌이다. 본격적인 소설을 쓰기전에 써 본 습작같다. 그런데 다른 상도 아닌 네뷸러 상을 받았다고 하니..


강하게 추천을 하지는 못하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비추를 날리고 싶지는 않다. 내가 판타지 소설에 너무 익숙하지 않은 탓일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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