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예술가에게
기돈 크레머 지음, 홍은정.이석호 옮김 / 포노(PHONO)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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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vs. 엔터테이너, 이상 vs. 현실

이건 정말 진부한 질문이다. 예술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너는 뭘 추구하는지 물어 볼 때, 도대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진정한 음악가의 길을 갈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많은 젊은 음악가들이 최고가 되고자 하는 꿈을 꿀 것이고, 최고라는 것은 물론 상업적인 성공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예술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오르는 꿈을 갖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보다는 이상을 좇는 것이 예술가의 운명..이라고 하기엔 현실이 만만하지는 않다. 기돈 크레머는 많은 음악가들이 꿈꾸는 위대한 음악가의 반열에 들어서 있는 연주자 중에 한 명이다. 엔터테이너가 되기보다는 예술가가 되어야 하고, 현실을 좇기보다는 이상을 꿈꿔야 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생각보다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현직 바이올린 연주자의 책이다. 모두 4부로 이루어져 있는 책인데, 1~3부와 4부의 성격이 좀 다르다. 책 속의 설명을 보면 1~3부는 독일어로 쓴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보내는 편지'이고, 4부는 영어로 쓴 '루트비히를 찾아서'이다. 앞의 세 개의 글은 끊임없이 음악가가 가져야 하는 자세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1부는 아우렐리아라는 한 피아니스트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미모의 피아니스트인 아우렐리아의 음악적 재능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미디어를 통한 성공에 매몰되어 버릴까봐 걱정한다. 2부는 호텔 방안에서 잠깐 쉬는 사이에 꾼 꿈을 적어놓고 있다. 3부는 음악에 대한 생각을 성서의 십계명에 빗대어 설명을 하고 있다. 사실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좀 지루할 것이라고 지레 추측을 했는데, 굉장히 재미있다. 좀 의외다.

 

기돈 크레머 Gidon Kremer(1947 ~ ) 자타가 공인하는 현존하는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중의 한 명.

 

사실 좀 속았다

글을 쓰는 방식이 좀 독특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쉽게 말하면 일반적인 형태의 에세이가 아니라 일정한 컨셉을 가지고 글을 써려 간다. 1부를 읽을 때는 아우렐리아라는 피아니스트가 누군지 잘 몰라서 검색을 해 봤는데 도대체 나오지를 않는다. 분명히 여자 피아니스트인 것 같은데 가능한 본명을 찾아 보고 해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절반 정도 읽으면서, '이거 가상의 인물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이 맞았다. 2부 역시 어처구니없는 설정으로 반어적으로 음악이 우스꽝스러워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데, 마음의 준비를 하고 봐서 그런지 꿈이라는 걸 금새 알아챌 수 있었다. 3부는 그런 반전은 없지만 성서의 십계명을 차용해서 음악에서의 금언을 적어 놓은 것이 흥미롭다.

 

글 좀 쓸 줄 아는 기돈 크레머
기돈 크레머의 바이올린이야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을테지만, 글까지 잘 쓸 줄은 몰랐다. 사실 음악가들이나 평론가들이 쓴 글은 지루하기 짝이 없을 때가 많은데, 이 책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저자가 말을 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거기에 더해서 읽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기돈 크레머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지만 굉장히 유쾌하고 재치가 넘치는 사람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미 연주자로서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글도 이렇게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다른 책도 있으면 읽어 보고 싶어 진다.

 

4장은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중에 최고의 앨범을 찾는 과정에서 기돈 크레머가 연주의 어떤 면을 살펴보는지 보여준다.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4장
앞의 3장도 굉장히 재미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4장이 제일 흥미진진하고 생각할 것이 많았다. 4장은 프랑스의 클래식 음악잡지인 디아파종 Diapason이 기돈 크레머에게 의뢰해서 10개의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 61)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연주음반을 선정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데서 시작을 한다. 스스로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이면서 당연히 같은 곡을 녹음한 기돈 크레머는 10장의 음반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고민에 빠진다. 기돈 크레머는 어떻게든 한 장을 뽑아야 하는 곤란한 처지에 놓이고 만다. 모두 다 훌륭한 연주이기 때문이다. 결국 기돈 크레머는 자신이 음악을 듣는 기준을 중심으로 음반을 하나하나 살펴 보면서 좁혀 나가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최고의 연주자가 음악을 보는 관점을 지켜 보면서 어떤 점에서 음악을 들으면 좋은지 안내를 받았다. 흔히 3대나 4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고 하는 유명한 바이올린 협주곡 중에 차이코프스키, 멘델스존, 브람스의 곡은 많이 들어 봤는데, 베토벤은 거의 들어 보질 않은 것이 아쉬울 지경이었다. 결국 몇 장의 음반을 주문해 버렸다. 이 책의 4장은 10장의 음반을 모두 들어 보면서 다시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기돈 크레머는 결국 최고의 연주 하나를 뽑아내고야 만다. 그런데...... 엄청난 반전이 독자를 기다린다. 마지막 몇 페이지를 보면서 나는 헛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고, 무의식적으로 입으로는 상소리를 내뱉었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고,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말을 내는 기돈 크레머의 극악무도함에 속았다는 사실이 억울했기 때문이다. 즐거운 속임수이자 반전이었다.

 

기돈 크레머가 추천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바로 이 한 장의 앨범이다. 지네트 느뵈 바이올린, 한스 로스바우트 지휘, 남서독일 라디오오케스트라 협연. 1949년 9월 녹음.

 

이제 막 예술을 시작하는 친구들에게..

음악이든 미술이든 어떤 종류의 예술을 하든,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현실적인 필요와 이상적인 목표 사이에서 갈등을 하기 마련일 것이다. 취미로 하는 것이 아닌 바에야 생활의 부담도 있고, 어쨌든 유명해 지고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는 것이 예술가로서 성공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분명히 원래의 초심을 잃고 대중의 입맛에 맞추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낙담에 빠질 수도 있다. 난.. 솔직히.. 어느 쪽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상업적인 성공도, 예술적인 성공도 이루지 못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거의 대부분일텐데, 어느 쪽이든 성공을 이룬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돈 크레머의 생각은 충분히 귀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는 말이고 이상적인데다가 도덕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게 정답이라고 장담은 못하겠다. 특히 지금같은 대중 예술의 시대에 기돈 크레머의 관점은 고루해 보일 수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예술적인 성취야 말할 것도 없고, 대중적으로도 성공한 대가가 하는 말이라서 오히려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 특히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므로 충분히 읽어 볼 만한 책이다. 더불어 일반 사람들도 읽기에 어렵지 않고 재미있다. 3장까지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4장은 좀더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추천한다. 클래식을 감상하는 방법을 자세히 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더욱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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