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왕이 이끈 대군과 북쪽에 매복하고 있던 대군을 하나씩 따로 쳐부수려 했는데, 오히려 한꺼번에 불러낸 꼴이 돼 우리가 거꾸로 몰리게 되고 말았구나. 크게 잘못되었다... 패왕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 재빨리 싸움터를 둘러보았다. - P109
한왕의 잦은 군사적 패배도 팽월이 진심으로 그 밑에 드는 것을 망설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애송이 위표를 왕으로 받드는 허울만의 관작을 받은 뒤로 팽월은 한 번도 한군이 통쾌하게 초나라를 이겼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 P114
제왕 한신이 가려 뽑은 군사 5만을 이끌고 달려온 것은 팽월이 한왕의 군중으로 든 날로부터 사흘 뒤였다. 한신은 팽월보다 며칠 늦은 대신 곱절의 대군을 이끌고 온 것으로 낯을 세웠다. - P118
마지막으로 남은 하책은 항왕이 아직도 자신의 처지를 깨닫지 못하고 팽성으로 달려가 그곳을 근거로 다시 서초를 일으켜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 P120
항왕은 타고난 무골(武骨)로 한 싸움, 한 싸움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뿐 길게 보고 계책을 짜낼 머리가 없습니다. - P123
한왕과의 싸움에서 패왕이 늘 속상해한 것은 한번도 한왕의 본진을 마음껏 짓밟아 보지 못한 일이었다. 언제나 멀찌감치 숨어서 바라보며 사람의 화나 돋우다가 정작 쫓아가면 잽싸게 머리를 싸쥐고 달아나는 게 한왕 유방이었다. - P145
한나라 대군은 열 갈래로 나뉘어 그물을 치고 패왕 항우가 걸려들기만을 기다리는 셈이 되었다. 뒷날 ‘구리산 십면매복’이란 전설이 나돌게 한 한신의 포진이었다. - P149
‘잘못되었구나. 무언가 아퀴가 잘 맞지 않는다. 자칫하면 크게 낭패를 보겠구나.‘ 앞뒤가 서로를 북돋아 가며 8만의 초군이 한 덩어리가 되다시피 밀고 드는 것을 보고 한신은 잠시 눈앞이 아뜩했다. - P158
‘졌다. 지고 말았다. 내가 이 항적이, 천하의 패왕이 정말로 싸움에 졌다. 군막 안에서 보검의 날에 남은 악전고투의 흔적을 수건으로 지우며 패왕은 줄곧 그렇게 중얼거렸다. - P167
"대왕, 밤사이에 또 적지 않은 장졸들이 달아났습니다." 그제야 불안해진 패왕이 물었다. "얼마나 줄었느냐?" "이번에는 2천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말에 패왕은 비로소 한군이 그 이틀 그저 에워싸기만 한채 말없이 기다려 온 것이 무엇인지 알 듯했다. - P177
이경 무렵이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떠들썩하게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군의 술판이 무르익어 흘러나오는 노래인가 싶었는데, 패왕이 가만히 귀 기울여 보니 그게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점점 높아지는 노래는 모두 초가(楚歌)였다. - P179
"대왕, 큰일 났습니다. 노랫소리에 홀린 사졸들이 마구 진채를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어서 막아야 합니다." - P183
힘은 산을 뽑을만함이여, 기개는 세상을 덮었어라. 때가 이롭지 못함이여, 오추마마저 닫지 않네. 오추마 닫지 않음이여, 그 일은 어찌해 본다 해도 우(虞)여, 우여, 어찌할 것인가. 너를 어찌할 것인가. - P185
패왕이 군막을 나가자, 밖에는 진채 안에 남은 장졸들이 그새 모두 모여 있었다. 으스름 달빛 아래 둘러보니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 노랫소리에 다시 절반이 빠져나가 남은 군사는 합쳐 3천이 크게 넘지 않았다. - P19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