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 정체성 정치를 넘어
마크 릴라 지음, 전대호 옮김 / 필로소픽 / 2018년 6월
평점 :
품절



격동의 대한민국, 보수와 진보

2016년 말부터 2017년 전반기까지, 한국사회는 이전까지는 없었던 미증유의 경험을 했다.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정치적 태풍은 대한민국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들었고, 그 영향은 2018년 전반기가 하른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혼란스러움을 생각해 보면 현재 문재인 대통령은 70-80%라는 이전의 대통령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경이적인 국정지지율을 누리며 놀라울만큼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많은 보수 인사들은 진보쪽으로 급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을 한탄하며 재기를 모색하고 있다.


정말 그럴까? 우리의 정치 지형이 진보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고 우리 시민들이 보수에서 진보로 바뀌었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2016년에서 2017년 사이에 벌어진 일들은 단지 비상식이 상식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사회의 의식이 전환된 것 같지 않다. '상식 vs. 비상식'의 대결에서 비상식이 종말을 맞고 이제 상식 안에서 '보수 vs. 진보'의 대결이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1년을 갓 지난 문재인 정부는 개혁적인 진보와 품격있는 보수의 자리를 차지해 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우측에 수구 세력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고, 그 왼쪽에 이제 막 커 나가려고 하는 진보세력, 그리고 더 왼쪽에 극단적인 진보 세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크 릴라(1956 ~ ) 미국의 정치철학자. 컬럼비아 대학의 인문학교수. 정치와 종교의 관계, 근대 서구 계몽주의에 대해 주로 연구하는 정치철학자.


정체성 정치 identity politics

지금은 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체제 분위기를 제대로 조성해 나가면서 우리나라에서는 큰 지지를 받고 있지만, 거의 전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을 당시에는 미국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까지 큰 충격을 받았다. 다행히도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은 우리나라에는 오히려 큰 도움이 되고 있지만 미국의 주류 사회, 특히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일 수밖에 없다.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는 2016년 미국의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되어 대통령이 된 이후 진보주의자들의 문제점을 진단하기 위해서 마크 릴라가 쓴 책이다.


이 책의 부제는 <정체성 정치를 넘어 After Identity Politics>이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마크 릴라가 지적하는 진보주의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체성 정치'이다. 정체성 정치는 '인종, 성별, 성적지향 등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정치세력을 구성해 그들의 이익과 관점을 대변하는 정치 (p.152)'를 말한다. 정체성 정치에서 대변하는 사람들은 주로 흑인, 여성, 성소수자이다. 각 나라마다 정체성 정치에 경도되어 있는 진보주의자들은 있을 것이고, 정체성 정치를 하는 진보주의자라고 하면 주류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대변하는 세력이라고 하면 맞을 것 같다. 마크 릴라는 정체성 정치를 펼치는 진보주의자들이 진보의 오히려 진보의 정권획득을 방해하고 보수주의자들, 심지어는 트럼프같은 사람에게 정권을 넘기고 있다고 설명한다.

 


도널드 트럼프 Donald Trump(1946 ~ ). 미국의 45대 대통령. 2016년 공화당 후보로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미국 역사상 유래를 찾아 보기 힘든 아웃사이더 대통령.


무엇이 문제인가?

아빠 문제. 진보주의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은 대통령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 낸다. 대선에서 이긴 후에는 다른 모든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고려없이 대통령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모든 요구사항이 다 관철된다면 이미 그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진보주의 세력은 대통령의 왼쪽에서 대통령을 끊임없이 저격한다.


X로서 말하는데.. 누군가 'X로서 말하는데, 네가 B라고 주장하는 것은 나를 모욕하는 거야'라고 말한다고 해 보자. 여기에 X에는 말하는 사람의 정체성이 들어갈 수 있고, B는 토론의 상대방이 X의 정체성에 대해 반대되는 주장을 넣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진보주의자와는 토론이 진행이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채식주의자로서 말하는데, 네가 사람들은 반드시 육류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나를 모욕하는 거야.'라든지, '동성연애자로서 말하는데, 네가 동성연애자 때문에 에이즈가 퍼진다고 주장하는 건 나를 모욕하는 거야'라는 얘기가 나오는 순간, 대화는 끊어진다. 토론이 이뤄질 공간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위의 두가지 사례 외에도 책 속에는 여러가지 사례가 제시되어 있는데, 읽는 동안 우리나라의 진보주의자들이 사용하는 화법과 태도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마크 릴라는 내용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도 있지만, 태도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이런 태도가 '절박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얘기일 것이다.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 놨더니 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른 결정을 내려서 실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수자로서 절박하게 살고 있는데 다수의 편견에 의해 나의 삶이 폄하당한다면 너무나도 억울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생존의 문제일 수도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문재인(1953 ~ ). 대한민국의 19대 대통령. 18대 대통령인 박근혜의 탄핵으로 갑자기 치뤄진 대선에서 혼준표, 안철수 후보 등을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정치적인으로는 중도진보~중도보수의 성향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분열


마크 릴라가 지적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저런 태도는 진보주의자들을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해서 모든 사회구조가 원하는대로 변한다면 그 사회는 독재사회이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자신의 발언에 반대하는 것은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는 어떠한 대화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연대를 얻어낼 수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더욱 심하게 분열이 되어 거꾸로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여성은 남자에게 '넌 여자가 아니니 나를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한다. 레즈비언은 '넌 여자이긴 하지만 레즈비언은 아니니 나를 이해하는 척 하지 마.'라고 얘기한다. 둘 다 평등을 얘기하고 있지만 또 느낌이 달라져 버린다. 남녀평등주의자는 성소수자로부터 왼쪽으로부터 또 공격을 당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분열이 되고 사회적 연대를 위한 공감대가 파괴되어 버리면 진보에게 남는건  패배뿐이다.


평범한 민주 정치란 '자기 자신과 유사하지 않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설득하는 일을 의미한다 (p.116)'고 마크 릴라는 말한다. 정체성 정치를 하는 진보주의자들은 민주 정치를 외면하면서 높은 위치의 연단에서 (스스로만 정의롭다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럴 수 있는) 주제에 대하여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로 정의롭지 못한 대중에게 설교를 쏟아내고 있다고 한다. 내가 지금까지 독재정권에 대하여 나 자신을 포기하면서 쌓았던 정의로움, 너희들은 모르는 내 삶의 절박함은 소수의 열정적인 지지자들을 만들어내는 훌륭한 사회운동은 될 수 있다. 하지만 적당하게 정의롭고 그다지 절박하지 못하지만 진보가 옳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연대하지 못한다면 정치 권력을 얻을 수 없다. 사회를 바꾸는 것은 더더욱 요원한 일이 되고 만다.

 


민주주의에서 다양성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다양성에만 매몰되어서 자신의 특수성만을 주장하여 다른 세력을 도외시한다면 '운동'은 될 수 있어도 '정치'는 될 수 없다. 타협하기 싫고 순수성만을 지키고 싶다면 정치를 하지 않으면 된다.


★★★★☆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는 미국학자가 미국의 정치상황을 분석하여 쓴 책이기 때문에 미국 정치 현실의 맥락에서 읽고 이해해야 한다. 실제로 현재의 미국사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미국 정치의 역사를 루즈벨트 대통령으로 부터 시작해서 레이건, 클린턴, 트럼프까지 정치지형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정체성 정치를 펼치는 진보는 미국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진보주의자들, 좀더 특정을 짓는다면 민주당의 왼쪽에서 목소리를 내면서 소수의 권익에(만) 신경을 쓰는 진보주의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고민해야 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진보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인 선민의식, 피해자의식의 폐해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해 놓은 책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동의하지 않더라도 한 번쯤 읽어 보고 고민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책이 얇고 내용도 좋고 번역도 잘 되어 있어서 정치관련 책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을 수 있다. 두께에 비해 책값이 좀 비싼 감은 좀 있다. 강력하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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