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형제 동화전집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
그림 형제 지음, 아서 래컴 그림, 김열규 옮김 / 현대지성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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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어릴 때 읽었다

언제 읽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읽었던 것 같다. 아마도 제목은 '그림 동화'였겠지. 어릴 때는 한 번 읽은 책을 수도 없이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으니 '그림 동화'도 굉장히 여러 번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용이 기억나는 것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수많은 동화 중에 어떤 것이 '그림 동화'이고 어떤 것이 '안데르센 동화'인지, 아니면 다른 이야기 책에서 읽은 건지 구별을 할 수가 없다. '헨젤과 그레텔'과 '라푼젤'이 '그림 동화'라는 건 확실히 기억을 하고 있다. '그림 동화'에 '신데렐라'와 '백설공주'가 있는 것도 몰랐고,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있는 것도 몰랐다. 어떤 동화가 있는지 기억하지 못한 채 읽기 시작한 <그림형제 동화전집>은 보물창고였다.

 

그림 형제의 동상. 형은 야코프 그림 (Jacob Grimme, 1785~1863) 동생은 빌헬름 그림 (Wilhelm Grimme, 1786~1859)이다. 독일의 법학자, 언어학자. 독일 문학과 옛 관습을 연구하던 중에 신화, 전설, 동화를 모아서 그림동화집을 발간한다.


윤리, 도덕, 개연성 따위는 기대도 하지 마라

<그림형제 동화전집>은 동화다. 나도 어릴 때, 아직 뭐가 뭔지도 전혀 모를 때 이 책을 읽었다. 지금은 성인이 되어버린 내 또래의 많은 친구들이 그랬을 것이다. 지금의 아이들도 나처럼 그렇게 그림동화책을 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아이들이 그런 것처럼 제목에 그림이 있으니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을 거라는 기대와 함께 읽기 시작하겠지. 그런데 말이지... 이 책이 정말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이 맞긴 맞는 건가? 어른이 되어서 다시 읽은 그림동화의 내용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동물들이 나오는 동화에서는 다른 동물들을 잡아 먹기 일쑤다. 공주는 금만 가지고 청혼을 하면 왕자와 사랑에 빠진다. 딸을 얻기 위해서 열두 명의 왕자를 죽이려고 하고, 아이고 어른이고 동물에게 잡아먹힌다. 왕은 아내를 모함한 자신의 어머니를 끓는 기름에 튀겨 죽이고는 왕비와 행복하게 산다. 여기저기서 피가 튀고 사지가 잘라져 나가는 등 끔찍한 장면이 펼쳐진다. 하지 말라는 건 꼭 해서 사고를 치고, 멍청하기 그지없는 주인공들이 주변에 엄청난 폐를 끼치기 일쑤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림형제 동화전집>은 동화다. 아이들 읽으라고 부모가 사주는 동화책에서 어른들이 보기에도 끔찍한 장면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왼쪽은 본책에 삽입되어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아서 래컴 (Arther Rackham 1867~1930, 영국)이 그린 라푼첼 삽화. 오른쪽은 디즈니에서 라푼첼을 소재로 만든 애니메이션. 라푼첼은 그림동화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에 하나이지만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아이들에게는 적당하지 않은 성적인 요소로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동화책이라고 하기보다는 설화집

그림형제는 형 야코프 그림과 동생 빌헬름 그림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처음 그림 형제가 동화집을 펴낸 것은 1812년이라고 한다. 지금으로 따지면 법과대학을 졸업한 법관 지망생인데, 법률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역에 퍼져 있던 설화를 채집했다고 한다. 채집한 49편의 설화를 모아서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집>이라는 제목을 붙서 책을 펴낸다. '그림 동화'의 첫 번째 버전이다. 첫 번째 책 이후 계속해서 판올림을 하고 1857년 제7판에는 모두 210 편의 이야기를 모아 책을 낸다. <그림형제 동화전집>에는 마지막 판에 실려 있던 210편의 동화가 모두 실려 있다.


그러니까 그림동화는 그림형제의 창작한 동화책이 아니고 당시에 떠돌던 설화들을 모아서 적당하게 변형을 해서 쓴 설화모음집이라고 하는게 더 어울린다. 그런데 이 책이 아이가 읽기에는 너무 잔혹하고 내용 전개에 개연성이 없어서 동화라고 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 실제로 처음 그림동화가 출판되었을 때는 최종판보다 더 잔혹하고 성적인 코드가 많이 들어 있어서 판을 거듭하면서 수위를 낮췄다고 한다. (아마도) 어릴 때 이 책을 마르고 닳도록 읽었을 나를 생각해 보면, 딱히 잔혹한 성인이 지는 않았으니 인격형성에 크게 나쁜 영향을 끼치지는 않은 것 같긴 하다. (내가 지금 범죄자가 아니라 다행이다.)

 

영화 신데렐라(2015)의 메인 이미지. 신데렐라는 전세계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그림형제 동화전집>에서 등장하는 신데렐라는 굉장히 투박하면서도 언니들이 신발에 발을 맞추기 위해서 발가락과 발뒤꿈치를 잘라내는 것같은 끔찍한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마녀도 나오지 않는다.


수많은 동화의 원형인 듯한 투박한 이야기

210편의 동화가 담겨 있으니 정말 온갖 얘기가 다 들어 있다. 얼핏 생각나는 유명한 것들만 해도 위에 써 놓은 동화 이외에 '개구리 왕자', '엄지 공주', '작은 빨간 모자', '브레멘 음악대'같은 동화가 담겨 있다. 내용도 가지각색이다. 어떤 것들은 굉장히 교훈적이면서도 권선징악을 제대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너무나도 잔혹하고 악인이 선한 사람들을 등쳐 먹는 이야기도 있다. 동물들이 주인공이 되는 우화도 있고, 정말 개연성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는 막나가는 스토리의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이야기들이 내가 알고 있는 세련된 이야기들이 아니다. 굉장히 투박하다. 이전에 읽으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천일야화>에 비하면 이야기의 구성이 형편없다. 책을 읽다 보면 마치 나무가 빽빽히 들어차서 하늘을 볼 수조차 없는 검푸른 독일의 숲 속을 걷는 것같은 느낌이 든다.


세련되지 않았다는 건, 아마도 많은 이야기들의 원형이 이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적이고 교양있는 사람들이 교훈을 주기 위해서 가필하기 전의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시중에 떠도는 이야기들이 반드시 주류 사회에 바람직한 이야기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림형제 동화전집>을 읽다 보면 시장통에서 사람들이 수군수군대며 하는 얘기들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체면치레하지 않는 거리의 이야기꾼들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막말과 자극적인 표현을 섞어가면서 마구 씨부리는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현대 미디어에서는 훨씬 정교하고 멋진 이야기로 탄생해서 동화책이 되고 애니메이션이 되고 영화가 되겠지만 이대로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책 속의 제목은 <열두 왕자>, 영어 제목으로는 <The Wild Swans>라는 제목의 동화. 마법에 걸려 백조로 변신한 왕자이자 오빠들의 저주를 풀기 위해 막내 공주는 7년 동안 말을 하지 않으면서 오빠들의 옷을 짜야 한다. 왕비가 되어서도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아 마녀로 몰려서 화형을 당하기 직전 백조들이 날아와 막 완성된 옷을 입고 왕자가 되는 모습은 어릴 때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 중에 하나다. 하지만 왕은 왕비를 모함했던 자신의 어머니를 끓는 기름과 독뱀들로 가득한 통 속에 던져 넣어서 고통 속에 죽게 만든다.


★★★★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은 기억을 지니고 사는 건 즐거운 일이다. 어른이 되어서 어릴 때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어릴 때의 기분과 감정으로 되돌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형제 동화전집>을 읽으면서 그런 기분을 느꼈다. 너무 오래전이라서 어렴풋이 단편적으로 기억하고 있던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건 정말 즐거웠다. 더불어서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아서 래컴의 삽화도 굉장히 멋지다. 그림동화니까 멋진 그림이 있는 건 당연하겠지.


이 책을 읽으면서 유일한 문제는 책의 분량이 너무 많은 것이었다. 종이 책 기준으로 1064페이지라서 읽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삽화가 200페이지 가까이 되니 분량이 좀 줄어들지만 그래도 900페이지 가까이 된다. 그래도 슥슥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까지 읽게 된다. 재미있으니까.


어릴 때 그림동화를 읽었던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 번 다시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다. 안 읽어 본 사람이라도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의 1/3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니까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주기엔 좀 꺼려진다. 그런데.. 다들 읽고서도 평범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읽으라고 줘도 큰 상관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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