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신학 이야기 살림지식총서 67
박만 지음 / 살림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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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신학의 나아가야 할 방향과 올바른 신앙을 정립하기 위해 어떤 몸부림이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화두를 꺼내본다. 저자는 한국교회의 신학과 신앙함의 과제를 풀기 위해 앞선 신학자들의 사상과 그들의 치열한 삶들을 소개하며 우리의 나아갈 바는 어떠해야 하는가? 먼저 저자는 20세기 신학자들 중 칼 바르트를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 말씀의 신학자로 그를 지칭하며 20세기 개신교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을 끼친 신학자이며 철저하게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 임마누엘 하신다는 것에 복종하는 순종하는 삶을 추구한 바르트를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인물로 그를 소개한다. 바르트 신학의 의미를 세가지로 간단하게 서술하는데 1. 말씀 중심,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라 이야기 하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이 텍스트를 제쳐 두고 컨텍스트에 매몰되어 하나님의 계시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며 말씀의 신학을 주창한 것을 그의 신학의 첫번째 특징으로 들고 있다. 2. 교회 중심의 신학, 3. 말씀으로 시대를 여는 예언자적 신학이라 소개한다.

다음은 바르트와는 대조된 인물로 틸리히를 소개하고 있다. 틸리히의 별칭을 경계선상의 신학자로 지칭한 것을 통해 틸리히의 신학함과 신앙이 어떠했는가를 알게된다. 바르트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온전한 계시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했다면 틸리히는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구체적인 상황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탐구하였다. 저자는 틸리히에게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이렇게 소개한다."틸리히와 같은 변증신학은 기독교 복음의 상황적 적실성을 가질 수 는 있으나 자칫 복음을 왜곡시킬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틸리히의 신학의 의미로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세가지로 소개하고 잇다. 1. 지적 정직성과 자유(하나님 말씀에 대한)에 대한 그의 추구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솔직한 의심과 질문 속에 이미 함께 계시며, 진리를 때로 의심의 골짜기를 지나서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2. 경계선상의 신학이다. 그의 삶의 전체가 경계선상에서 고민하며 양자간의 창조적인 만남을 도출해 내려고 노력한 신학자이다. 3.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질문에 맞추어서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하려 했던 변증신학이다.

다음은 우리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본회퍼를 소개하고 있다. 나치의 치하에서 고백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는 형태가 무엇인가를 교회와 사회, 국가에 알리며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던진 순교자인 신학자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진실한 신앙인의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며, 이웃을 위한 삶(옥중서신)을 실천하기 위한 우리의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호소를 들을 수 잇다. 또한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깨우침 받는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새로운 시작입니다" 고 죽음을 앞 둔 그의 이야기를 통해 사후의 하나님의 심판과 보상이 있음을 믿게 된다.

이렇게 20세기 전반 현대 신학에 영향을 끼치 3학자를 소개하고 뒤이어 20세기 후반기의 신학의 특징으로 해방신학과 과정신학, 생태계 신학을 소개하고 있다. 20세기 후반의 신학을 백가쟁명의 시대로 명명하며 다양한 신학함이 존재하고 있음을 저자는 이야기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다양성들을 정리해보면 해방, 대화, 생명이라는 용어로 정의할 수 있다. 

결론으로 이 시대의 한국 신학은 수많은 영적 경험과 현상들을 제대로 분별할 기독론적이고 성육신적이며 '세상적인' 영성 신학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신학자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이루어 가야 할 시대적 사명일 것이다.

비록 작은 소책자이지만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어떤 신앙의 존재로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과 질문을 던지는 책이었다.  이 작은 책자의 만남의 시작을 통해 닻을 올리고 보다 넓은, 보다 깊은 신앙의 항해를 해 나가는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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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이란 사람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빼앗아서 뭉개고 짓밟고 사람답지 못하도록 만드는 가장 무서운 재앙이니, 이것이 사람 사이에서 비롯된 일이라면 피를 흘리고라도 없애야 할 것이며, 이는 바로 하늘 아래 온갖 만물이 생명의 섭리 안에 자라듯이 하늘의 뜻을 바로잡아야 될 것인지라. -- 본문 중에서 --

한 줌도 안 되는 세력들이 그들의 것이 아닌 것을 틀어지고, 또한 그것으로 망나니 처럼 휘두르게 된다면 천명을 받은 민초들의 두 주먹이 서슬퍼런 칼날이 되어 그들을 징치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쫓겨난 이들이 더 이상 밟혀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민초들에게 장길산은 그들의 생명력을 과시하며, 움켜지려는 이름이다. 그 이름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은 썩은 세상을 깡끄리 태워 새 세상을 열어 나갈 것이다. 그들의 행보가 차츰 하나로 모아지고 있다. 모든 민중이 장길산이 되는 세상이 곧 열리게 되는 그날이 곧 다가올 것이다.

"해마다 함께 추수하여 우리끼리 이렇게 나누어 먹구 살면 좋겠다. 간섭하는 놈들두 없고 빼앗아갈 놈들두 없을 테니 요순 시절이 뭐 따로 있나"  -- 조동지의 쌀을 빼앗아 나누는 백성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   경자유전( 耕者有田 ) 의 세상은 반만년의 역사 속에서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민초들의 가슴은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큰, 그리고 소박하지만 위엄이 있는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는 세상을 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런 민초들을 비웃는 세력이 자기 배만을 채우려는 탐욕이 민초들의 심장에 비수를 꽂고 있구나!

산지니 가족의 소박한 삶을 자신의 개같은 섹스욕을 채우기 위해 마치 아귀새끼처럼 탐욕의 이빨을 드러내어 삼키려는 더러운 자들... 그들에게 낫을 드리댄 것은 민초들의 심판의 전형이 되었다. 생존의 필수수단이 낫이 이제 자본과 토지를 물귀신처럼 움켜지려고 하는 자들을 징벌하는 심판의 칼날이 되어 그들의 심장에 ......

함께 노동하며 함께 나누는 세상을 바라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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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르트의 설교학 정인교 역 한들출판사

 

설교의 본질을 논하기 앞서 제 정의들을 분석, 비판을 하며 새로운 정의를 도출하는 시도를 한다. 제 정의로 홀라츠(이중과제:해석과 적용), 슐라이에르마허(자의식) 비네(수사학), 팔머, 니츠(변증법적 통합-선교설교, 회중설교), 바우어(이 때는 오히려 퇴보를 가지고 왔다고 생각), 페쩌(영감을 받은 한 증인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누구도 할 수 있는 것이 설교이다), 펜트등의 설교학을 분석, 비판 하며 설교의 초점을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에 모아져야 한다고 정의내린다. 바르트는 하나님께서 빈약하기 이를데 없는 인간의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용하셔서 그 자신의 말씀을 전달하시는데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경외함 가운데 설교는 행해지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런 정의에 입각하여 설교를 정의하는 데 필요한 구성요소로 다음과 같이 아홉 가지를 들고 있다. 1. 계시 혹은 하나님의 말씀, 2.설교의 자리로서의 교회,  3. 하나님의 명령, 4.설교자의 틀별한 직무 5. 설교가 하나의 시도라는 생각 6.성서와의 관계 7. 자기 자신의 말의 개념 8.회중의 개념  9. 출발점이며 위대한 중심 그리고 초석으로서의 성령 

이런 기준들을 틀을 삼아서 자신의 설교학을 논해나가고 있다. 그 내용들을 목차에 따라 정리해 보면 먼저 설교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기준은 설교의 계시적합성과 교회성, 신앙고백적 성격이어야 하는 것, 직무적합성, 거룩성, 성서성, 독창성, 회중적합성, 영성들이다. 설교의 적합성에서 그는 그것에 대해서가 아닌 그것으로부터 이야기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계시로부터 설교가 이뤄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생각에서 나온 정의들을 살펴보면 설교란 끊임없이 내려가는 일이며, 어떤 목표에 도달하려고 올라갈 일은 아니다. 모든 것이 이미 일어났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이것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임마누엘)를 의미할 때만 올바르게 이야기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다"에서 머물러서도 안되며 그렇다고 단지 "된다"에만 머물러서도 안된다. 반대로 "이다"에서 "된다"로의 행보가 밝히 드러나야 한다. 설교의 계시적합성을 결정하는 두 점은 성탄절과 주님의날이다. 만일 설교가 이 두 점 안에서 행해진다면 이 설교는 계시적합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교회의 정의와 존재 기반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 오직 설교와 성만찬이 함께 곁들인 올바른 예배가 드려지는 곳에서만 비로소 예배는 그 정당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오직 거기에서만 예배가 소위 성례로 나아간다는 자신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참으로 물리적, 역사적 실재이며 사실적 가시적인 몸이지만 동시에 신비에 싸인 그리스도의 비가시적 인 몸이기도 하다. 교회가 이 두 가지 성격을 똑같이 지니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성례전의 거행과 복음의 선포 역시 그 어떤 경우에도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성례전은 교회의 실존에서 수행되는 계시의 사실에 대한 지침이다. 반면 성경이라는 존재는 사건의 질 즉 계시의 내용을 가리키는 지침이다. 성례전은 그 사건의 발생을 증언하고 성서는 이 사건의 내용을 증언한다.다음으로 설교의 신앙고백으로 설교가 복종 부르심 과제를 의미한다면 이것은 결국 설교가 신앙고백적 성격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이다. 그는 시편 119:176절 성서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속함과 동시에 설교자의 상황에 잘 부합하는 구절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바르트는 설교자가 지녀야 할 구체적인 태도방식을 1)성서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2) 성서의 해석자가 된다는 의미에서 관심을 쏟는 인간이 됨을 의미 3) 자신에게 주어진 본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또한 언제나 거기에 기술되어 있는 것에 대해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4) 겸손 5) 가동성-설교자가 성서와 함께 하는 생명의 역사 속으로 설교자와 하나님 말슴 사이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가가 발생하게 된는 그 역사속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설교의 실제적인 준비의 부분에서는 상황(설교자의 상황),설교 본문의 선택의 문제(가급적 짧은 본문 피한다.자주 이해되고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본문을 주의을 기울임, 우화적 해석 버림, 어떤 의도를 지닌 연설이 되지 않아야 한다), 수용적 기능, 능동적 기능 등을 언급하며 설교를 준비하는 설교자의 태도와 습관, 훈련받아야 할 것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바르트가 이야기하는 설교자가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규정된 성서 일과"와 연속 강해 설교' ' 매일 성서를 가까이 대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본문 취급을 위한 제 규칙으로 본문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석 혹은 적용만을 말해서는 안된다. 본문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라, 주석은 설교단에 오르기전 확실히, 반드시 현재적인 의미를 강조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들고 있다.

 바르트의 설교학을 통해서 그는 얼마나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신학자인가를 알게 되었다. "말씀인 육신이 되었다" 이것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단지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을 호소하는 그 외침에서 설교자이기전 앞서 신앙인의 삶이 어떠해야하는 가를 깨닫는 소중한 책이었다. 바르트에 대한 그릇된 소문과 악설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선 진정한 바르트를 찾아 나가야 겠다.  

본문 요약을 나중에 한번 더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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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의 시작은 명상으로 시작하여 기대했으나 후반기로 갈수록 내용이 진부한 것만 나오게 되어 마이동풍식으로 결론을 보았다.

명상- "되새기다" 성서를 자기 자신에게 조용하게 속삭이면서 낭독하는 것, 을 갈망하면서 읽는 것, 소유하는 즐거움, 명상하는 것은 먹는 것과 같다. 말씀에 대한 즐거움은 현존하는 것에 대한 희열과 현존하지만 결코 성취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 또한 말씀의 복습으로 말씀에 대한 들음으로 완성  * 행 13장 33절 에 시편 제 2 편을 첫 시편으로 표현

명상없는 주석은 공허하게 되고 주석없는 명상은 맹목이 된다.

성서에 관한 명상은 부활의 음악을 위한 전주곡이다. 항상 기록을 하지 않는자는 결코 훌륭한 설교자가 될 수없다. 설교작성은 사전 연습,ㅡ 서곡을 필요로 한다.

입이 차기전에 마음이 가득차야 한다. 마12:34 

시간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얻는 자는 또한 시대 정신에 대한 새로운 관계도 발견할 것이다.

남의 설교를 읽는 일의 필요성

내용-설교를 하는 사람(명상,모범으로서의 설교자, 악습목록) 설교를 듣는 청중

 

루돌프 보렌, 박근원 역 대한 기독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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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라트저, 문희석, 김균진 공역 대한기독교 출판사. 1977.

 

구약성서를 설교함에 있어서 모든 본문을 설화로 전제하며 시작하는 것에 조금은 거부감이 들며 불트만적인 비신화화한 설교의 형태를 띠는 것은 아닌가 생각도 든다. 그러나 본문을 해석하는 관점과 흐름을 잡는 그의 생각은 탁월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폰라트와 보른캄, 캄펜하우젠은 그들이 구약을 어떻게 해석하며 설교할 것인가를 공동으로 고민하면서 연구 발표회를 통해 나타난 결과물들을 책을 발간한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동의 문제로 확인한것은 성서의 본문은 설교로 선포되어야 한다. 성서의 본문은 설교로 선포될 수 가 있다. 서론부분에서는 성서 주석과 설교의 관계를 설명하고 이어지는 부분은 설교를 서론 본론 결론의 형태로 설교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창세기 4장, 12장, 16장, 22, 32, 50 수 1장, 왕상19, 왕하5,20 욥기2: 시편 32, 96, 사40, 52, 61장 렘 29, 31, 학개2, 말3장 히브리서 4장의 설교들이 그 본론이다.

그중 수 의 설교의 내용을 약술 하면 서론은 구속사적인 장소의 지정, 이것이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이스라엘은 구속사건의 마지막 장면을 가장 완숙하고 신학적으로 가장 강하게 회상하는 해석을 하고 있다.  본론 수에게 하신 말씀은 어떤 중간 상테에 약속과 성취의 사이에 선택과 궁극적인 구원의 상태사이에 끼여 있는 것, 이스라엘이 마지막 순간에 자기의 구원을 그르칠 수 있다는 염려의 숨은 소리를 우리는 여기서 들을 수 잇다.

가나안의 선택과 성취 사이에서 나타난 상황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것이었는지 설화는 잘보여주고 있다고 설명(정탐꾼의 보고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바로 다음에 디딘 발걸음을 모두 이미 하나님에게서 지신 된것으로 알 수가 있다면 그 때 우리의 신앙은 요구한 것을 읽은 신앙이다. 이미 만졳한 상태에 빠진 신앙이다. 약속후 '토라'의 책에 충실하라는 경고가 이어진다. 토라는 복음과 율법을 함께 포함하는 것이다.

 

나중에 위의 본문들을 설교할 때 참고하자.

 

저자는 설교의 완벽한 형태를 제시해 준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본문을 해석하는 눈을 넓힐 것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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