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관계는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점에서의 만남이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이다. 이것은 단지 부딪힘에 불과하다. 모든 인간을 상품화로 전락시키고, 모든 인간의 가치를 상품생산 능력으로 판단하는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잃어 버린 인간관계 회복이 최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신영복 교수의 '강의'를 좀 더 세밀히 정리하여 보고, 나름의 해석구조를 만들어  제러미 리브킨이 꿈꾸는 '유러피언드림' 을 다시 한번 정리 이해할 시간을 가져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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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 영성시인 고진하 목사
틈틈이 인도 순례, 우파니샤드 입문서 내기도
‘기독교 밖에도 구원 있다’는 스승 만나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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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원주에서 치악산 기슭으로 올라가다보면 ‘살구꽃 언덕’이 나온다. 행구동이다. 고진하(56) 목사가 사는 곳은 치악산 계곡과 맞닿은 마당에 잔디가 깔려 있고, 봄꽃 잔치가 한창인  2층집이다. 표정만이 아니라 삶터도 인간의 영혼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그다운 집이요, 그다운 풍경이다.
 
그는 개신교 목사이면서도 목사만은 아니다. 김달진 문학상을 수상하고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등 5권의 시집을 낸 영성 시인이자 숭실대 문예창작과와 모교 감신대에서 강의하는 교수이다. 그 뿐 아니라 틈나는대로 인도를 여행하는 순례자이기도 하다. 지난 2002년부터 인도를 오가던 그가 최근 ‘고진하의 우파니샤드 기행’이란 부제가 붙은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비채 펴냄)을 내놓았다. 영성시인다운 감각과 적절한 비유들이 곁들여진 이 순례기는 일반 대중들이 우파니샤드에 다가서기에 가장 적절한 책으로 손꼽을만하다.
 
우파니샤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전해주는 최고의 영적 지혜서다. 우파니샤드는 ‘가까이’(우파)+‘아래로’(니)+‘앉는다’(샤드)의 합성어로, 스승이 아끼는 제자를 가까이 앉히고 은밀히 전해주는 지혜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우파니샤드>는 내 생의 위안이자 죽음에 이르기까지 위안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늘 머리맡에 두고 읽었다. 쇼펜하우어뿐만 아니라 예이츠, 막스 뮐러, 데이비드 흄 등 서양의 위대한 작가와 철학자들이 앞 다투어 <우파니샤드>를 연구하고 번역했다.
 
딸이 반려자로 데려온 무슬림 청년에 “한눈에 반해”
 
Untitled-3 copy.jpg저자가 목사임에도 그는 ‘신(하나님)은 누구인가’를 묻지 않고, ‘나는 누구인가’를 묻기 위해 인도로 떠났다. 당시 그의 절친한 친구조차 “인도에 미쳤군. 이젠 기독교의 울타리도 벗어나 훨훨 날아가려는 모양이지?”라고 놀렸다고 한다. 친구의 말처럼 기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려는 목적은 아니었지만, 그가 인도에 미친 것은 사실이었다. 실은 그는 원할 때는 무엇에나 미칠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제도 종교의 좁은 틀로 가둘 수 없는 그의 영혼은 감신대 재학시절 변선환 교수와 만나면서부터 비상을 준비했는지 모른다. 변선환은 동서신학을 아우르는 대표적인 신학자로 손꼽히면서도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한마디로 ‘기독교의 유일한 진리성’을 부인했다는 누명을 받고 감리교단으로부터 목사직, 학장직, 교수직, 신자직까지 박탈당한 그의 스승이었다. 고 목사는 이 책의 첫페이지에서 ‘종교 간의 경계를 넘어 광활한 영성의 바다에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유영하며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고 변선환 선생님께 바칩니다’라고 썼다.
 
스승에게 고백한 대로 그는 강원도 영월의 촌사람답게 강릉 사천제일교회에서 8년, 이곳 치악산에서 9년째 살고 인도까지 오가며 자유롭게 유영했다. 그의 자유로움은 그 하나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아내 권기화씨는 히말라야 요가를 해 깨어있으면서도 고요하며 멋스러운 분위기를 지닌 요가수행자다. 또 권씨가 요가를 배우던 인도 리시케시로 따라나섰던 딸은 3년 전 타고르가 세운 인도의 산티니케탄의 비스바바라티대학으로 조각공부를 하러갔다. 그 딸이 유학중 일생의 반려자감으로 택한 남자친구는 이란에서 온 무슬림 화가였다. 인도 여행중 바라나시로 딸이 데려온 무슬림 청년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렸다”는 그 딸의 아버지에게 청년은 자신은 수피라고 했다. 무슬림 중에도 수피는 다른 종교를 거부하지 않으며 신성과 영성을 추구한다. 그 수피 청년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가슴으로 안은 듯한 눈빛의 예수 그림을 그에게 바쳤다. 치악산 그의 집 거실엔 무슬림 청년이 그린 예수 그림이 있다.
 
고 목사는 인도의 수많은 사원과 거리에서, 바람처럼 떠도는 음유시인인 바울들과 탁발 수행자들과 만나면서 점차 고요한 내면 속으로 들어갔다. 안내자는 물론 그가 가슴으로 안았던 우파니샤드였다. 마침내 “그대 안에 다 있는데, 왜 바깥 풍경만 기웃거리느냐?”는 내면의 음성을 느낀다. 그러면서 시인답게 스스로에게 묻는다.
 
 보물은 네 안에 있는데,
 왜 바깥에서 보물을 찾으려 그토록 애썼는가.
 왜 나지도 죽지도 않는
 네 존재의 항아리에 담긴
 영원한 생명의 황금빛 보물을 캐내려 하지 않았는가.
 눈만 뜨면 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
 윤회의 고리를 보면서도
 왜 환의 술에 취해
 네 자신의 참된 자아로 깨어나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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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라는 강줄기가 당도해야 할 궁극의 바다로
 
고 목사는 그런 물음에 대해 “네가 그것이다”, 즉 “네가 곧 아트만(참자아)”이라는 자각으로 답한다. 그리고 그는 “여러 강이 끝내 하나의 바다에 이르는 것처럼 내가 의탁해온 기독교라는 강줄기가 당도해야 할 궁극의 바다가 어디인지를! 나는 <우파니샤드>를 읽으며 영성의 광활한 바다에 진입하는 희열을 맛보았고, 내가 믿어온 하느님이 바로 내 존재의 심연에 닻을 내리고 계신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우파니샤드의 진리를 통해 천주교신자이면서 동학의 생명사상가였던 장일순 선생을 생전에 만났던 것보다 더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 깊이 느끼게 됐고, 마침내 자신의 참모습을 자각하게 됐다.
 
그는 기독교에 큰 광명을 비춰준 영성가로 어거스틴과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꼽는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원죄론만으로는 동양세계와 대화하기 어렵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는 지하의 광맥을 통해 기독교 영성이 동양의 종교들과 회통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또 우파니샤드를 경험한 뒤 성경에도 표현이 다른 같은 내용이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17장이다.
 
‘아버지여,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길어낼수록 더욱 더 풍성한 영성의 샘물은 우파니샤드를 통해 나왔다. 우파니샤드 중의 우파니샤드라 불리는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태양신 수리아를 ‘생명의 원리’(진리·다르마)로 본다고 한다.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생명의 원리가 최초로 태양에 점화되었다는 것이다. 고 목사는 내가 내 안에 참자아가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면, 자기의 본성을 회복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인간, 즉 신성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깨달음을 통해 나온 책 한 장이 밝고 맑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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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변한 교회와 신자 하나 없지만 그래도 더욱 더
 
그러면 태양이 간직하고 있는 참 모습이란 무엇일까. <바가바드 기타>를 주석한 비노바 바베는 태양이 간직하고 있는 참 모습을 ‘욕망 없는 활동’이라고 말한다.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은 ‘나는 저 어둠을 살라버릴 거야. 어두운 지상에 빛을 비춰 새들을 지저귀게 하고, 꽃을 피어나게 하고, 사람들이 즐겁게 일하도록 할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태양은 그저 하늘에 떠올라 그 빛으로 세상을 비출 뿐이다. 우리는 태양이 활동한다고 말하지만, 태양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만일 우리가 캄캄한 어둠을 몰아내고, 지상에 빛을 비춰 만물을 자라게 하고, 사람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태양을 두고, 대단한 일을 한다고 말한다면, 태양은 이렇게 대꾸할 것이다.
 
빛은 나의 본성일 뿐이네. 꽃이나 새를 보게. 향기를 내뿜는 것이 이 꽃의 본성이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새의 본성이듯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게 나의 본성일세. 나는 내가 빛을 발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네. 나에겐 내 존재 자체가 빛일 뿐이네.
 
그렇다. 빛을 비추는 건 태양의 자연스런 존재 방식이다. 그러나 자기 본성에서 멀어진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참자아를 망각한 인간은 자기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선을 행할 때도 행위 뒤의 결과를 생각한다. 은행에 예치한 돈이 있으면 돌아올 이자를 계산하듯이, 우리의 행위가 가져올 열매를 기대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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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도 손익을 따지고 남을 도울 때도 돌아올 보상을 계산한다. 행위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순수성을 잃어버린 사랑은 소유욕에 불과하다. 순수성을 상실한 자선은 자기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려는 욕심에 불과할 뿐이다. 크리슈나는 이처럼 행위의 순수성을 상실한 오늘의 아르주나들에게 충고한다.
 
 행위의 결과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말라.
 언제나 만족해하며
 철저하게 독립적이 되라.
 그러면 비록
 이 행위의 한가운데 있다고 해도
 그대는 행위하지 않는 사람이다.
 <바가바드 기타>
 
변변한 교회와 신자 하나 없지만 그래도 더욱 더 예술세계에도 마음이 열린 그는 “화가나 음악가나 시인이 아니면 크리스천이 아니다”라고 했던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암 브레이크의 말대로 더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깨어나고 있다. 그의 아내 또한 90이 넘은 시어머니와 돈을 많이 벌어본 적이 없는 남편과 살면서도 “올해는 된장 네말과 고추장 두말을 담가두니 손님이 와도 걱정이 없어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됐다”며 평화로운 미소를 짓는다. 가치를 알아보는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준 게 하나도 아깝지 않은 하늘과 달과 치악산과 계곡물과 꽃들의 미소가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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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교회 손수 짓는 정훈영 목사
축사 빌어 농사 거들고 짓고 어느듯 17년
전도는 이슬처럼 젖듯 말듯 어느새 ‘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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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일까. 이 시골에 저렇게 아름다운 한옥을 짓는 이는. 천안시 북면 병천천을 따라 골짜기로 들어가면 아름다운 한옥이 숨어있다. 북쪽은 “암행어사 출두야”를 외쳐 고난받는 민초들의 아픔을 보듬어주었던 어사 박문수의 묘가 있는 은석산이고 남쪽은 흰구름 머금은 운봉산이다. 마치 객들을 환영하듯 길가에 늘어선 나무 터널을 지나 운봉산 아래 서있는 한옥이다. 한옥 기와에 입혀진 색이 곱다. 어느 대갓집보다 큰 기와집이지만 위압적이기보다는 평안하다.
 
단비교회 정훈영(46) 목사가 6년째 손수 지어온 한옥교회다. 땀으로 쌓아온 한옥 앞에서 정 목사는 입을 실룩이며 수줍은 듯 옆으로 비켜선다. 잘 다듬은 도시의 정원수가 아니라 거친 들판에서 비틀어지고 쓰러지면서 서로를 보듬어주는 생명 본연의 표정이다. 정제된 증류수라기보다는 갈라진 목을 적셔주는 막걸리같은 그의 어디에서 이렇듯 깔끔한 한옥을 지어내는 마음이 숨어있는 것일까.
 
한 해 두 해 세 해…, 머슴처럼 일하자 농사꾼 이웃으로 인정
 
정 목사에게 이곳은 목사로서 출발점이었다. 또한 종착점이 될 곳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세상 젊은이들이 시골을 버리고 도시로 떠나갈 때인 17년전인 1992년 그는 연고조차 없는 이 마을에 들어왔다. 50여가구에서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들만이 살아가는 마을이었다. 마땅히 머물 곳이 없던 그는 짐승들을 키우던 축사를 빌어 거처하면서 예배를 드렸다. 교인도 교회도 없는 마을에 나타난 젊은 목사 부부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평생 논밭에서 흘린 땀에 연륜이 켜켜히 배어있는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그는 어쭙잖게 전도하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않았다. 그냥 젊은이의 일손이 필요한 논밭으로 달려가 일을 도왔다. 논밭으로 돌아다니며 청하지도 않은 일을 자청했다. 농사철이면 부지깽이의 힘이라도 빌린다는 농촌이다. 들판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대부분이니 농사일이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처지에 힘깨나 쓰는 그는 농삿일이 힘겨운 동네 어른들에겐 구세주였다.
 
한 해 두 해 세 해…, 정 목사가 머슴처럼 논밭에서 일을 하자 ‘쓸만한 농사꾼’으로 여겼는지 마을 사람들이 논밭을 내어주기 시작했다. 시골에 별장이나 지어서 놀다가 내키지 않으면 돌아갈 그런 도회지 사람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붙이고 살만한 사람으로 여긴 것이다. 정 목사는 그 때부터 자신의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농민들의 방식을 답습하지는 않았다. 그에겐 꿈이 있었다. 땅과 농민과 먹거리와 소비자를 동시에 살리는 생명농업의 꿈이었다. 그가 화학비료나 농약을 일체 쓰지않고 농사를 짓자 “그렇게 해선 농사를 모두 망치게 된다”면서 마을 사람들이 더 걱정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첫 해 농사가 잘 되었고, 수고한만큼 가격도 더 많이 받았다. 그러자 그의 설득이 먹혀들기 시작했고, 다음 해 다섯농사가 8천평에 유기농사를 함께 짓기 시작했다. 들판에서 땀으로 함께 하면서 교인들도 한명씩 두명씩 생겨났다. ‘고속 성장’을 지향하는 도시와 달리 이곳에선 1년에 한두명 늘어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더욱 귀하고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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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교회에서 쫓겨날 처지 되자 비신자 할아버지도 꼬깃꼬깃 쌈짓돈
 
비록 축사교회지만 그렇게 막 자리를 잡을 즈음이던 2002년 축사의 주인이 땅을 팔아야겠다고 통보해왔다. 월 15만원을 받는 목사로서는 그 땅을 살 엄두를 내기 어려웠고, 대출을 받기 위해 저당 잡힐 재산조차 없었다. 꼼짝없이 이 마을에서 나가야할 처지였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할아버지들도 정 목사네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혀를 찼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이들에게도 정 목사는 한마을 식구였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염려 덕택이었을까. 그렇게 암담한 그들에게 단비가 내렸다. 축사에서도 쫓겨나게 생긴 그의 처지를 안 사람들이 십시일반 후원을 해온 것이다.  천행으로 땅을 구입했다.
 
10년 넘게 지내온 땅에서 쫓겨날 처지에 있던 정목사네가 그 땅 1500평을 산 것을 안 이 마을 최고령 할아버지가 정 목사의 부인 이애경 사모를 불러 앉혔다. 교회에 나오지도 않는 그 할아버지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십만원을 주면서 말했다.
 
“내 생전에 이렇게 기분 좋아보긴 처음이유.  교회가 그 땅을 사게 돼서 이제 아주 이 마을에서 살게 됐으니 말이요. 이 돈 정 목사한티 줘유. 땅 사는데 보태지는 못해도 오매가매 기름값이라도 하게유.”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우리 할매에겐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미 교회에 열성인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그 마음을 싫어할 리 만무였다. 그토록 마을 어른들이 격려해주었지만 땅 구매만으로 모든 일이 끝날 수 없었다. 땅주인이 땅을 팔고도 축사 사용료를 요구했다. 결국 땅만 구매했지 축사 사용료를 낼 처지가 못되자 축사를 허물었다. 그러자 갈 곳 없는 정 목사네는 컨테이너 상자에서 지내면서 손수 흙집을 지었다. 지금 교회 겸 사택으로 쓰는 곳이다. 너와로 지붕을 얹은 지금의 토담집에서도 정 목사의 향기가 그대로 풍겨난다.
 
수도와 수련 하고싶은 이들에게 공동체센터로 내놓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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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목사는 가장 바닥에 있을 때 그 바닥에 천상을 그려내는 사람이었다. 생명농업과 어울리는 한옥교회를 짓는 꿈을 그가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는 2003년 실현에 옮겼다. 흙과 나무를 옮길 힘 외엔 가진 것이 없는 무모한 시도였다. 젊은날 목수 노릇을 했던 마을 할아버지를 모셔 식사를 대접한 뒤 그 할아버지가 손짓하는대로 짓다보니 그도 어느새 반목수가 되었다. 농사철이면 들판에서 일을 하고, 그 사이사이에 지은 한옥은 어느새 골격을 다 갖추고 내부 공사만을 남겨두고 있다.
 
이 마을 인근 산위엔 우리나라 유일의 개신교여성수도자공동체인 디아코니아수도회가 있는데, 이 수도회는 2003년부터 이례적으로 정목사네 가족을 공동체의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한 공동체에서 같이 살지는 않지만 디아코니아의 영성을 실현할 가족으로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디아코니아수도회 안에서 살아가는 10명의 여성독신수도자들처럼 기도에만 전념하는 삶이 아니지만, 들판과 한옥건축 현장에서 땀흘린 ‘삶의 기도’와 아름다운 가족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이애경 사모와 세 자녀인 정다우리(15) 산우리(13), 효비(8) 가족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정 목사네는 비록 수도자로 살아가지는 못하지만 수도와 수련을 하고싶은 가족들과 개인들이 언제든 와서 쉬면서 영성을 고양시킬수 있는 공동체가족센터로 한옥교회를 내놓을 계획이다.
 
상황이 어려울 때 더욱 경쟁의 가치에 매몰되는 세상사람들과 달리 가장 어려울 때 한옥교회의 꿈을 꾸었던 정 목사 부부의 자녀 교육도 남다르다. 다우리·산우리 두아이는 친구들이 중학교를 간 사이 집에 머물며 지낸다. 집에서 영어공부도 하고, 바이올린과 비올라고 켜고, 많은 책을 읽으며 틈틈이 아빠의 일도 돕는다.
 
“이제 다우리가 많이 커서 제법 도움이 돼, 옛날에 일 시킨다고 아이들 학교 안 보내는 부모 심정이 이해가 간다”는 정 목사의 유머스런 웃음이 욕망과 갈증으로 목마른 바닥에 단비처럼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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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신비한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의 은사로서의 카리스마를 분별하는 일은 영성생활의 소중한 실천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카리스마의 분별을 위해

우선 진지한 기도의 시간을 갖고 영적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눠야 한다.

둘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것'

셋째는 은사의 분별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려는 심정으로 깊이 기도해야 한다.

마지막은 성령의 영감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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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기도는 '하는' 기도보다는 '되는' 기도이고, 성서도 우리가 읽기 이전에 '읽혀야' 깨달음이 오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 안에 있는 자연스럽고 유연하고 자유로운 우리의 영성이 현실 속에서 가려져 있다면 그 가려진 무엇을 뚫고 나올 수 있도록 돕는데 모든 영성에 대한 독서와 수련이 집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책은 '우리 안에 영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성 안에 우리가 있음'을 깨닫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 책이다.

책의 내용은 먼저 영성의 흐름으로 기존에 오해된 것을 바로 잡고 [영성에 대한 오해 다섯 가지 : 그리스도교 영성은 개인적인 문제다. 2. 그리스도교 영성은 내면적인 영역에 국한 된 문제다. 3.영성은 정적인 것이다. 4. 영성은 오로지 순수하게 영과 정신의 세계와 관계한다. 5. 영성은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있는 문제다.  이런 오해를 극복하는 것은 통전적인 영성이 되어야 함을 저자는 이야기한다.] 통전적 영성이란 곧 하나님과 인간, 몸과 영혼, 초월과 내재, 개인과 공동체, 성과 속 등의 관계 속에서 조화롭게 꽃피는 총체적인 영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음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출발점이 어디이어야하는가를 이야기 하고 있다. 또한 영성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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