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케는 학문의 세계를 현실세계가 갖는 제문제와 연결시키려 끊임없이 시도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바르트에게 사사하면서 윤리학을 교의학의 한 부분으로 취급하는 스승에 반하여 먼저 윤리학을 톡파한 후 교의학에 접근했던 사실은 삶 속에서 행동하는 신앙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 바르트에게는 하나님의 현실이 문제였으나 나에게는 이 세계의 현실이 문제 "라는 그의 언명은 그의 관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웅변해준다. 틸리케의 신학적 관심과 특색은 해석학적 문제와 관련해서 그는 데카르트적 신학 진영의 중심에 위치한 비신화화 주장을 반박한다. 그는 변화되는 인간이 아닌 변화시키는 하나님과 그 말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나 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의 질문의 전화, 그리고 되어져 가는 존재로 자기를 인식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인식과 변화는 인간 자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신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말씀에 이루어지는 '밖으로부터의 사건'이며 이것을 인지하는 신앙 역시도 말씀의 창조이다.

루터 신학위에 선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신학을 바탕으로 중심을 상실한 시대가 의미있는 삶이 되기 위해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회복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유주의에 의해 무시되어진 '말씀'과 '개혁신앙'의 가르침을 일깨우는데 진력하였으며 현대의 문제들을 복음의 빛 아래 조명, 해석 그리고 처방하려 노력하였다.

틸리케의 설교관은 1. 설교자는 무엇보다 성경 본문이 담고 있는 문제를 정확히 직시하고 그 의미를 포착해야 한다. 2. 설교언어가 현대적 비종교적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3. 신학은 설교의 기초가 되고 신학의 전개가 곧 설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4. 설교가 주어지는 상황에 지대한 관심을 쏟는다. 상황을 도외시한 설교가 잇을 수 없으며 이 상황과 경험은 설교에서 반드시 영원성에 의해 조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5. 설교의 문제는 곧 설교자의 문제라는 등식을 제시한다.

"남편은 한번의 설교를 위해 20회의 강의 준비하는 시간을 소비했다." 이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대학교수에서 학생, 주부,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청중을 불러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노력의 산물이 그의 설교였다. 그의 이런 설교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첫번째 두드러진 특징은 상처입은 회중을 감싸고 싸매는 위로와 치유의 내용이다. 이것은 '인간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그의 신학적 통찰이 밑받침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교리적 예수를 진술하기보다는 인간의 삶속에 동행하시는 동행자와 치유자 그리고 안내자로서 예수를 설교함으로 상처받은 영혼에 대한 위로와 평안의 메신저가 되었다. 두번째 특징은 루터신학의 대변자 답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다. 세번째 특징은 '성도의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더불어 사는 삶과 구체적 도움의 손길을 그 해답으로 제시한다. "자기 자신을 축구하지 않는 자만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주 단순하게 그냥 사랑하며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은 자들만이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된다."  네번째는 체제의 변혁을 통한 사회개혁보다는 각 개인의 변화와 신앙에 우선적 강조점을 둔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옛 마음, 기만적이고  대단히 부패한 것이 변화되지 않은 한 세곅 변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다섯번 째 특징은 교회와 신학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경고의 메시지이다. "예수는 채직에 맞았고.. 체계와 철학이라는 감옥에 갇히곤 했다. 그느 개념의 무덤 속에 갇혀왔고 사상의 시체가 되어 차디찬 돌판으로 덮여왔으며.." [믿음의 출발점]

틸리케 설교의 기술적 특징 1. 회중에 대한 고려가 두드러진다. 회중들의 의문에 연대함으로 회중으로 이해의 문을 열도록 도와준다.  2. 신학논쟁에 대한 과감한 소개이다. (가령 복음서 내용의 상이성에 대한 신학논의를 소개한다든지. 복음서의 기적기사에 대한 성서학자들의 주장을 소개) 3. 풍부한 상상력을 최대한 활용한다.

틸리케의 설교의 형식 분석 1. 일정한 주제를 선정하여 연속으로 그 주제를 설교하는 방식 2. 강해설교의 장점과 이야기식 설교의 구조가 그의 설교에 절충된 방식으로 드러난다. 3. 설교시작시 주로 본문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결론부분은 예외없이 희망과 위로 격려와 비전 제시로 일관한다.

그는 뜨거운 가슴의 복음적 설교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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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계, 살주계!! 민초들의 삶을 짐승 이하로 취급하는 놈들에게 이들은 일침을 가하기 위해 칼을 뽑아들었다. "이제 저는 한판관 따위나 쳐죽이고 형틀 아래 허무하게 죽지는 않을 거예요. 이런 세상을 만든 자들과 싸우렵니다. 제가 싸우다 죽으면 다른 이들은 제 죽음에서 사람답게 사는 법을 배우게 되겠지요" 본문 중에서 산지니가 그의 누이 석씨에게 내뱉은 말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민중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산진이는 깨닫은 것이다. 밟으면 밟을 수록 민심은 일어서고 그 본질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중길, 북성, 시동, 모신 옹기장이 부부와 그 아들 등과 이름없이 빛도 없이 죽으며 쓰러져 간 이들이 민초들의 힘의 밑거름이 되어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 갔다.

"미륵은 언젠가 오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넋 가운데 시시때때로 찾아들어 이렇게 잠깐 당신을 현신시키고는 넘어진 내 고깃덩이를 넘어 다른 넋으로 찾아가신다. 미륵은 내게 왔다. 미륵 언제나 이 자리에 있다. "  민중들의 생과 사 가운데 미륵은 존재하며 약동하며 유유히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큰 강을 이루며 흘러갈 것이다.  그것을 석산진의 누이는 본다. "산진아 저 모양이 보이느냐, 저 멸망해 가는 도성 궁궐의 장엄한 낙조가 보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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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이란 사람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빼앗아서 뭉개고 짓밟고 사람답지 못하도록 만드는 가장 무서운 재앙이니, 이것이 사람 사이에서 비롯된 일이라면 피를 흘리고라도 없애야 할 것이며, 이는 바로 하늘 아래 온갖 만물이 생명의 섭리 안에 자라듯이 하늘의 뜻을 바로잡아야 될 것인지라. -- 본문 중에서 --

한 줌도 안 되는 세력들이 그들의 것이 아닌 것을 틀어지고, 또한 그것으로 망나니 처럼 휘두르게 된다면 천명을 받은 민초들의 두 주먹이 서슬퍼런 칼날이 되어 그들을 징치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쫓겨난 이들이 더 이상 밟혀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민초들에게 장길산은 그들의 생명력을 과시하며, 움켜지려는 이름이다. 그 이름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은 썩은 세상을 깡끄리 태워 새 세상을 열어 나갈 것이다. 그들의 행보가 차츰 하나로 모아지고 있다. 모든 민중이 장길산이 되는 세상이 곧 열리게 되는 그날이 곧 다가올 것이다.

"해마다 함께 추수하여 우리끼리 이렇게 나누어 먹구 살면 좋겠다. 간섭하는 놈들두 없고 빼앗아갈 놈들두 없을 테니 요순 시절이 뭐 따로 있나"  -- 조동지의 쌀을 빼앗아 나누는 백성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   경자유전( 耕者有田 ) 의 세상은 반만년의 역사 속에서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민초들의 가슴은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큰, 그리고 소박하지만 위엄이 있는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는 세상을 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런 민초들을 비웃는 세력이 자기 배만을 채우려는 탐욕이 민초들의 심장에 비수를 꽂고 있구나!

산지니 가족의 소박한 삶을 자신의 개같은 섹스욕을 채우기 위해 마치 아귀새끼처럼 탐욕의 이빨을 드러내어 삼키려는 더러운 자들... 그들에게 낫을 드리댄 것은 민초들의 심판의 전형이 되었다. 생존의 필수수단이 낫이 이제 자본과 토지를 물귀신처럼 움켜지려고 하는 자들을 징벌하는 심판의 칼날이 되어 그들의 심장에 ......

함께 노동하며 함께 나누는 세상을 바라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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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르트의 설교학 정인교 역 한들출판사

 

설교의 본질을 논하기 앞서 제 정의들을 분석, 비판을 하며 새로운 정의를 도출하는 시도를 한다. 제 정의로 홀라츠(이중과제:해석과 적용), 슐라이에르마허(자의식) 비네(수사학), 팔머, 니츠(변증법적 통합-선교설교, 회중설교), 바우어(이 때는 오히려 퇴보를 가지고 왔다고 생각), 페쩌(영감을 받은 한 증인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누구도 할 수 있는 것이 설교이다), 펜트등의 설교학을 분석, 비판 하며 설교의 초점을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에 모아져야 한다고 정의내린다. 바르트는 하나님께서 빈약하기 이를데 없는 인간의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용하셔서 그 자신의 말씀을 전달하시는데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경외함 가운데 설교는 행해지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런 정의에 입각하여 설교를 정의하는 데 필요한 구성요소로 다음과 같이 아홉 가지를 들고 있다. 1. 계시 혹은 하나님의 말씀, 2.설교의 자리로서의 교회,  3. 하나님의 명령, 4.설교자의 틀별한 직무 5. 설교가 하나의 시도라는 생각 6.성서와의 관계 7. 자기 자신의 말의 개념 8.회중의 개념  9. 출발점이며 위대한 중심 그리고 초석으로서의 성령 

이런 기준들을 틀을 삼아서 자신의 설교학을 논해나가고 있다. 그 내용들을 목차에 따라 정리해 보면 먼저 설교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기준은 설교의 계시적합성과 교회성, 신앙고백적 성격이어야 하는 것, 직무적합성, 거룩성, 성서성, 독창성, 회중적합성, 영성들이다. 설교의 적합성에서 그는 그것에 대해서가 아닌 그것으로부터 이야기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계시로부터 설교가 이뤄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생각에서 나온 정의들을 살펴보면 설교란 끊임없이 내려가는 일이며, 어떤 목표에 도달하려고 올라갈 일은 아니다. 모든 것이 이미 일어났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이것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임마누엘)를 의미할 때만 올바르게 이야기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다"에서 머물러서도 안되며 그렇다고 단지 "된다"에만 머물러서도 안된다. 반대로 "이다"에서 "된다"로의 행보가 밝히 드러나야 한다. 설교의 계시적합성을 결정하는 두 점은 성탄절과 주님의날이다. 만일 설교가 이 두 점 안에서 행해진다면 이 설교는 계시적합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교회의 정의와 존재 기반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 오직 설교와 성만찬이 함께 곁들인 올바른 예배가 드려지는 곳에서만 비로소 예배는 그 정당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오직 거기에서만 예배가 소위 성례로 나아간다는 자신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참으로 물리적, 역사적 실재이며 사실적 가시적인 몸이지만 동시에 신비에 싸인 그리스도의 비가시적 인 몸이기도 하다. 교회가 이 두 가지 성격을 똑같이 지니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성례전의 거행과 복음의 선포 역시 그 어떤 경우에도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성례전은 교회의 실존에서 수행되는 계시의 사실에 대한 지침이다. 반면 성경이라는 존재는 사건의 질 즉 계시의 내용을 가리키는 지침이다. 성례전은 그 사건의 발생을 증언하고 성서는 이 사건의 내용을 증언한다.다음으로 설교의 신앙고백으로 설교가 복종 부르심 과제를 의미한다면 이것은 결국 설교가 신앙고백적 성격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이다. 그는 시편 119:176절 성서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속함과 동시에 설교자의 상황에 잘 부합하는 구절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바르트는 설교자가 지녀야 할 구체적인 태도방식을 1)성서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2) 성서의 해석자가 된다는 의미에서 관심을 쏟는 인간이 됨을 의미 3) 자신에게 주어진 본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또한 언제나 거기에 기술되어 있는 것에 대해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4) 겸손 5) 가동성-설교자가 성서와 함께 하는 생명의 역사 속으로 설교자와 하나님 말슴 사이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가가 발생하게 된는 그 역사속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설교의 실제적인 준비의 부분에서는 상황(설교자의 상황),설교 본문의 선택의 문제(가급적 짧은 본문 피한다.자주 이해되고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본문을 주의을 기울임, 우화적 해석 버림, 어떤 의도를 지닌 연설이 되지 않아야 한다), 수용적 기능, 능동적 기능 등을 언급하며 설교를 준비하는 설교자의 태도와 습관, 훈련받아야 할 것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바르트가 이야기하는 설교자가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규정된 성서 일과"와 연속 강해 설교' ' 매일 성서를 가까이 대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본문 취급을 위한 제 규칙으로 본문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석 혹은 적용만을 말해서는 안된다. 본문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라, 주석은 설교단에 오르기전 확실히, 반드시 현재적인 의미를 강조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들고 있다.

 바르트의 설교학을 통해서 그는 얼마나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신학자인가를 알게 되었다. "말씀인 육신이 되었다" 이것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단지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을 호소하는 그 외침에서 설교자이기전 앞서 신앙인의 삶이 어떠해야하는 가를 깨닫는 소중한 책이었다. 바르트에 대한 그릇된 소문과 악설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선 진정한 바르트를 찾아 나가야 겠다.  

본문 요약을 나중에 한번 더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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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의 시작은 명상으로 시작하여 기대했으나 후반기로 갈수록 내용이 진부한 것만 나오게 되어 마이동풍식으로 결론을 보았다.

명상- "되새기다" 성서를 자기 자신에게 조용하게 속삭이면서 낭독하는 것, 을 갈망하면서 읽는 것, 소유하는 즐거움, 명상하는 것은 먹는 것과 같다. 말씀에 대한 즐거움은 현존하는 것에 대한 희열과 현존하지만 결코 성취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 또한 말씀의 복습으로 말씀에 대한 들음으로 완성  * 행 13장 33절 에 시편 제 2 편을 첫 시편으로 표현

명상없는 주석은 공허하게 되고 주석없는 명상은 맹목이 된다.

성서에 관한 명상은 부활의 음악을 위한 전주곡이다. 항상 기록을 하지 않는자는 결코 훌륭한 설교자가 될 수없다. 설교작성은 사전 연습,ㅡ 서곡을 필요로 한다.

입이 차기전에 마음이 가득차야 한다. 마12:34 

시간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얻는 자는 또한 시대 정신에 대한 새로운 관계도 발견할 것이다.

남의 설교를 읽는 일의 필요성

내용-설교를 하는 사람(명상,모범으로서의 설교자, 악습목록) 설교를 듣는 청중

 

루돌프 보렌, 박근원 역 대한 기독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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