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맘때 나는 무척이나 지쳐있었다. 같은 이야길 반복하는 것도, 같은 이야길 반복해서 듣는 것도, 숨쉬기도 어려울만큼 갑갑한 거리에도, 변하지 않는 창을 계속해서 새로고침 하는 것에도, 모두 질려버렸었다. 떠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달라질게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내가 받는 스트레스는 그 사람이 받았던 고통에 비하면 하잘것 없을 것 같았고, 조금이나마 남아있을 나의 밝은 에너지를 전해주기 위해 나는 길을 나섰다. 

속초는 내게 많은 의미가 있는 도시다. 이제 볼 수 없음에도, 아직도 마음 속 가장 큰 방 하나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 도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서울터미널에서 짧은 이별과 만남을 수도 없이 반복했었기에, 버스를 타기도 전부터 나는 그를 떠올리며 젖은 상념에 푹 빠져 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잘해줄걸, 지금은 뭘 하고 지낼까 등등등 아쉬운 마음은 금세 지워버리고서는 앞으로 만날 친구를 떠올리며 설레는 마음을 그리기 시작했다. 종내에는 내게 아직도 로맨스가 남아있다면 바로 이 사람이다! 라고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참고로 내게 로맨스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랄까. 뭐, 그런거다. 

그렇게 가는 길 내내 내 마음 속에는 여러가지 사랑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는 길을 함께해준 동반자이자, 가장 위대한 연애소설이라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불타는 연애가 아닌, 레빈의 노동에 대한 예찬이었다.  

   
 

레빈은 그들 사이에서 나아갔다. 한낮의 더위에도 풀베기는 이제 그다지 힘든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온몸을 적신 땀은 그를 시원하게 해주었고, 등과 머리와 팔꿈치까지 소매를 걷어올린 팔에 내리쬐는 태양은 노동에 필요한 힘과 끈기를 주었다. 그리고 그가 하고 있는 일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게 하는 그 무아의 순간이 더욱 자주 찾아왔다. 낫이 저절로 풀을 베었다. 그것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즐거운 순간은 두둑들이 맞닿아 있는 강가까지 베어나간 다음 영감이 축축하게 젖은 풀로 낫을 닦고 맑은 강물에 그 날을 씻고 나서 생철통에 물을 떠서 레빈에게 건네준 때였다.
"어떻습니까, 내 크바스가! 그래, 좋죠?" 그는 눈짓을 하면서 말했다.
아닌게 아니라 레빈은 풀잎으 동동 뜬, 생철통의 녹슨 맛이 나는 이 미적지근한 물처럼 맛난 음료를 아직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곧 낫을 손에 든 채 유유히 움직이는 행복한 걸음이 시작되었다. 그동안에는 흐르는 땀을 닦는 것도, 가슴 가득히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도, 풀 베는 일꾼들의 긴 행렬이며 주위의 숲이며 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바라보는 것도 자유였다.

 
   

나는 풀을 베어본 적도, 농사를 지어본 적도 없지만 땅과 농사에 대한 이야기에는 맥을 못추고 홀려버린다. 그런데 톨스토이의 수려한 문장으로 묘사된 무아의 경지의 풀베기라니! 안나와 브론스키의 절망적인 연애이야기는 이제 그만 좀 나오고 레빈의 농사이야기나 더 나왔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흥미롭게 읽어내려갔다. 레빈의 생동적인 에너지가 흘러넘쳐 나에게까지 전해져왔고, 나는 이 에너지를 친구에게 전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들떴다. 

하지만 붕붕 뜨고, 따뜻해진 마음은 차갑고 썰렁한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가라앉고 말았다. 야위어서는 환자복을 입고, 참외와 키위를 깎아주는 친구에게 난 뒤늦게, 아무것도 가져오지 말라는 말을 너무 잘 들었던걸 후회했고, 실은 내가 생각보다 밝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뜨거운 속초의 햇살을 받으며 우린 해변의 공원을 걸었고, 친구는 무심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용기가 되는 한 마디를 무척이나 해주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난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린 백로와 날치로 화제를 전환했다.  

처음 먹어보는 막국수를 엄청 맛있게 먹고, 볕을 피해 그늘 아래 앉아 시원해진 바람을 쏘이다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 참외와 키위를 깎아 먹고, 음악을 듣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애초에 계획했던 밝은 에너지 전달은 물론이거니와 약간 기대하고 있었던 나의 기분전환. 두마리 토끼 다 잡지 못했다. 집으로 오는 길은 쓸쓸했고, 외로웠다. 게다가 노동의 기쁨에 전율하던 레빈은 키티와의 사랑에 푹 빠져 농사는 안중에도 없었다. 사랑 따위,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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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1-06-14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사랑이나 로맨스 "따윈" 곡괭이질을 하다가도 눈이 맞으면 순식간에 파파박...하는 것...ㅋㅋ

Forgettable. 2011-06-14 21:57   좋아요 0 | URL
메피님.. 요즘은 그런 사랑 할 수 있을까 자꾸 의심이 나는데, 그 의심을 가라앉혀줄만한 로맨스 하나 나타나지 않는 나이인가봐 ㅠㅠㅠㅠㅠ 하며 자꾸 슬퍼져요!! 할 수 있겠죠??!!!

Mephistopheles 2011-06-16 12:51   좋아요 0 | URL
의심이라기 보단 두려움이 아닐까? 라는 생각...^^

Forgettable. 2011-06-19 19:51   좋아요 0 | URL
문장이 좀 이상하다 했는데 단어선택의 문제였군요.......
인정하기 싫지만... ㅠㅠㅠㅠㅠㅠㅠ

2011-06-14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4 2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4 2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1-06-14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랬어요. 이 풀베기 장면에서 완전히 압도당해서 줄 계속 치면서 나는 왜 이렇게 큰 관련 없는 노동의 묘사에 감동받을까 자문했었어요. 그래서 이 페이퍼에 엄청 공감합니다.

Forgettable. 2011-06-14 22:03   좋아요 0 | URL
아ㅏ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정말요?????????? 기뻐라!
저 이 풀베기 장면 정말 엄청나게 환희에 몸을 떨며(아직 읽고 있어서 문장에 여파가 ㅋㅋㅋ) 읽었거든요. 신나네요, 괜히.

다른 이야기들도 물론 좋지만 전 러시아의 예술과 문화와 정치와 토지개혁과 사상에 관한 것들을 읽는 것이 참 좋더라구요.

Joule 2011-06-17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나 카레니나에서 최고로 치는 두 장면 중 하나예요. 다른 하나는 푸르푸르가 브론스키를 태우고 달리는 장면. 무려 두 사람에게(두 사람이 제 인맥의 전부라서 쩝) 그 장면을 읽어 줬다는.

Forgettable. 2011-06-19 19:54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저도요!! ㅠㅠ 그 장면도 읽으면서 어찌나 흥분을 했는지 -_-;;;
정말 대단했어요. 두근두근하면서 읽었어요 ㅋ

근데 역시 좋은 문장은 많은 사람의 동의를 불러일으키는군요. (쥴님과 같은 부분을 꼽은)저의 안목에 감탄을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