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키에 갈 때마다 난 대자연 앞에서 자신이 초라해짐을 느낀다. 또한 그 어떤 사진도 산맥의 웅장한 아름다움을 온전히 담아낼 수가 없어서 매번 사진을 들쳐볼 때마다 좌절한다. 그럼에도 엄마말마따나 꿀발라 놓은 것처럼 틈만 나면 가는 이유는 내 자신이 초라해짐과 동시에 무수한 나의 고민도 먼지가루처럼 흩날리기 때문이다.
그림에서만 보던 눈 쌓인 산을 바라보며 그 산에서 흘러 내려온 빙하물의 거친 물살을 따라 래프팅을 할 때도, 수천년 동안 협곡을 만들며 멈추지 않고 흐르는 폭포수의 힘찬 물소리를 들을 때도, 나는 감히 오르지도 못할 거친 돌산이 무수히 이어져있는 것을 볼 때도, 끝도 없이 푸른 침엽수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나 석양이 내리는 초원이 내 눈이 허락하는 곳까지 펼쳐져 있어 지구가 둥글다고 느껴질 때 난 귀가 멍멍해지며 눈앞이 흐려지곤 한다.
누군가는 자꾸 보니 감흥이 없다고는 하지만 난 자꾸 아쉽기만 하다. 도시를 떠날 때마다 언젠가 다시 와서 한달은 머물며 언제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산자락을 지겨워질 때 까지 거닐겠다고 다짐한다.
낯선 도시의 길거리에서 친숙한 작가의 작품을 발견하는 일은 참 신선하고 낯선 일이다. 일행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래봤자 이해를 바랐던 것도 아니었지만) 원래는 콜롬비아에 가서 직접 보려고 했던 보테로의 작품을 캘거리의 어느 박물관에서 접했다. 아기자기하고 귀엽고 에로틱한 줄로만 알았던 작품들에는 모두 그들만의 표정이 있었고 그것은 고통과 슬픔이었다.
이유도 없고 자비도 없었던 폭력에 상시 노출되어 있었던 사람들의 아픔이 그림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낯선 도시에서의 새롭고 신나는 경험에 들떠서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림을 보기 시작했다가 나는 중간에 백팩을 락커에 보관하기 위해 한 층을 내려갔어야 했다. 그들의 짐이 하나씩 내 어깨에 내리기 시작해서 차츰 다리에 힘이 풀려갔기 때문.
피사체의 고통과 더불어 현대 예술계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확고하게 구축한 예술가의 노력이 한데 어우러져 건방진 관광객을 숙연케 했다. 콜롬비아 타령하면서 자꾸 미루기만 했다면 난 그 어떤 것을 놓쳤을진데, 일행들의 히스테리를 감내하면서까지 봐서 참 다행이었다.
관계에서 초월하고 싶다. 그 어떤 관계든 집착과 행복과 분노와 슬픔의 연결고리에서 풀려나고 싶다. 하지만 풀려나고 싶지 않다. 예전에는 그 모든 격렬한 감정들이 다 나를 성장케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견뎠는데 그 성장이라는게 단지 덜 집착하고 덜 행복하고 덜 분노하고 덜 슬퍼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이 날 두렵게 한다. 뭔가 억누르는 것이 있어서 답답한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날 받쳐주는 것이 없어서 안정적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