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글을 쓰지도 않는데 고맙게도 방문해주시는 수많은(!) 방문자들을 위해, 차라도 대접하고 싶지만, 곧 백수가 될 예정인 주제에 카드빚 말고는 가진게 마땅찮아 아쉬운 마음을 시로 달래본다.  

다들 무언가 꽉 잡고 있는데
그걸 놓치면 조난당할까 두려워하는데
그는 인파에 몸을 맡기고 유영한다
몇 차례 큰 파도 지나가고
남극 같은 지하도 계단에
섬이 되어 앉아 있다.

W의 [어부생활사] 中

다행인지 당연인지, 내게는 시를 쓰는 후배가 있다. 연휴 중 흥청망청 술로 보내는 시간의 일부를 그와 함께 잠시 나누었는데, 일본으로 오랜 기간 떠나있을 그 친구가 내게 A4지 뭉텡이를 자랑스레 건넨 중의 일부이다. 친구는 그의 시를 읽고는 80년대 감성을 키보드에 두들기고 있냐며 비난했다지만, 난 그의 치열한 단어선택이 좋고, 나로서는 절대 알지 못할 본질적인 외로움이 두렵고, 그럼에도 시에 담긴 따스함을 발견하는 순간이 좋다.  

몇개의 시 중에는 자기고백이 담긴, 굳이 말하자면 증오하는 아버지에 대한 시가 하나 있었는데, 나는 왠지 그 시가 나에게 주는 편지같았다.  

이십팔일 후,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멍청하게도 항생제 몇 십 알을 처먹었다. 운 좋게도 나의 어머니는 그 사실을 자정에 알았다. 착한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피곤한 일일구를 출동시켰다. 나는 모르는 척 잠을 잤고 망할 놈의 고대병원새끼들은 그를 또 치료해줬다. 그 착한 아들의 생각을 나는 도통 알 수가 없다. 뭐 그도 나를 잘 모르겠지만. 그런데 웃긴 것은 착한 그녀의 생각도 도통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W의 [기시감, 착한 아들, 그리고 복선] 中

왤까, 이런 아픈 기억을 풀어서 꺼내보일 수 있다고, 그만큼 많이 자랐다고, 아버지에 대한 미움도 그만큼 사그라들었다고 웃으며 건네는 편지같았다.

핸드폰이 없던 베이비 펌의 귀여운 신입생, 나와 함께 서양 고전 철학, 미학개론 같은 가장 어려운 수업만 골라 듣던 후배, 치매에 걸린 나이많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아무도 오지 않을까 걱정하던 친구, 음악만 할거라고, 시만 쓸거라고 하다가도 금새 취업 걱정을 하던 친구, 마음먹자마자 JLPT 시험에 덜컥 붙은 친구, 긴 팔로 안아주며 '누나! 사랑해요!' 라고 애인보다도 더 크게 외쳐주는 나의 후배. 이 친구와 다시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괜히 눈물을 글썽거리며 하얀 A4지 종이 위의 글자들을 다독였다. 언젠가 우리 친구의 시가 떵떵거리며 우쭐대는 꼴을 한번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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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12-28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에 대해 시를 쓸 수 있다는 건, 이미 내면에선 화해했기 때문이라 생각되네요.
자기 내면에서 화해하지 않았다면 어떤 글도 쓸 수 없을테니까요.

Forgettable. 2009-12-29 00:4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유독 자기 시 평가 받기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이 글을 보여주고 싶은데 제가 생각한게 틀릴까봐 망설이고 있답니다. 근데 왠지 순오기님의 댓글이 힘이되네요^^

뷰리풀말미잘 2009-12-28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백수가 된다니 듣던중 반가운 소리네요. 그렇잖아도 어떻게 됐을랑가 궁금했는데 선뜻 물어보기가 어려웠어요. 어쨌거나. ^^ 웰컴 투 리얼월드!

2009-12-29 0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9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9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zydevil 2009-12-29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네요, 두루두루...

Forgettable. 2009-12-29 01:01   좋아요 0 | URL
정말요?? 데빌님도 좋으세요? 참 다행이에요^^ 전 이 친구 시가 모든사람에게 마구 다가가서 어떤 방식으로든 반향을 일으켰음 해요 ㅎㅎ 저 잘시간을 너무 지나버려서 큰일이에요ㅠㅠ 낼 아침이 무지 걱정되요 ㅠ

푸하 2009-12-29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 시군요.
공감이 많이 되네요.

Forgettable. 2009-12-29 09:1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는 시를 잘 모르기도 하고, 딱히 시에 반응한 적은 없는데 지인의 시라서 좋은건줄 알았거든요.괜히 제가 기분좋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