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가을에, 내가 겁도 없이 원서를 샀던 건 영어에 자신감이 붙어서였다기 보단, 한국에서 가져온 읽을 책들이 램프레히트의 [서양철학사] 밖에 남지 않아서였다. 어려운 책들만 골라서 가져갔는데도, 흥청망청 노느라 책읽을 시간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4개월만에 그 책들을 모두 2번씩 읽어버리고, [서양철학사]를 읽다가 자다가 하며 반이나 읽어버렸을 무렵 난 서점에 가기로 결심한 건 아니고, 친구의 문법책을 사러 서점에 따라갔다. 

내용을 알면 읽기 쉽겠지 하며 [향수]와 [백년동안의 고독]을 사게 되어버렸는데, 자기 전에 조금씩 읽다보니 신기하게도 참 잘 읽힌다. 그래서 용기내어 마르케스의 단편집도 사게 되었는데, 다른 어떤 책보다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읽었다는 이 쓸데 없는 이야기를 왜 하고 있냐면, 바로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에 그 단편집 중 한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마르케스의 이야기를 원어로 읽기 위해 콜롬비아에 갈 계획을 세우고 있는 한 사람으로, 그의 이야기와 그의 수다를 정말 미칠듯이 사랑하는데, 한 장 읽고, 그 한 장이 아까워서 책을 덮고 책을 안고 바둥대다가 다시 또 한 장 읽고,,, 를 반복하고 있다. 그러다가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 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보니 내가 3년 전에 읽었던 단편집의 'Siesta' 였던 것이다.  

왠지 그 때 읽었던 이야기들은 내 마음 속에 아주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다. 이야기들 자체도 재미있고 분위기가 좋았지만,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쓰인 이야기를 읽는 것은 좀 더 환상적이고 색다른 이미지의 언어로 이야기를 접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단지 짐을 줄여보겠다며, 이젠 더이상 보지 않는 사람에게 그 책을 딸려보내는 바람에 한국에 와서 내내 그 이야기를 그리워했었기에 이야기들은 점점 미화되고, 동시에 희미해져갔다.   

그러던 와중에 그 이야기중의 하나를 뜻하지 않게 다시 만나고, 또한 그 이야기가 마르케스의 잊을 수 없는 경험담이었다는 사실을 읽으며 다시 책을 덮고 바둥댈 수밖에 없었다. 마치 호주에서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 친구를 명동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것만 같았다. 정말로 책장을 넘기는게 아깝다. 난 행복하다. 

(작년에 단편집을 알라딘 외서에서 사긴 샀는데, 원래 내 책보다 표지도 거지같고 영어도 거지같아져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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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브리엘 마르케스 작품들
    from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2009-12-05 19:24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면서도 한없이 미루는 목록들이 있다. 가브리엘 마르케스도 그 중 한 명이다. 내가 그의 소설을 읽은 것은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한 권 뿐이다. 그 책도 딱히 마르케스가 끌려서 읽은 것도 아니고, 김기덕 감독의 『활』과 『시간』에서 마르케스의 그 소설이 잠깐 언급되어서 '학습의 목적'으로 읽은 것이 다이다. 게다가 민음사에서 출판한 그 소설은 갈색 잉크로 인쇄가 되어 있어서 읽기에 상당히 거슬렸었다! (그리보면 책은 처음의 형식에서
 
 
Arch 2009-10-14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나 좋다고 하는 줄 알았음. ^^
내가 다 몸이 간질거리는 것 같아요.

Forgettable. 2009-10-15 09:53   좋아요 0 | URL
언니도 좋아요. ㅋㅋ (간질간질)

Arch 2009-10-15 09:55   좋아요 0 | URL
하하, 간지러워요.

바밤바 2009-10-15 0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 책은 영어로 읽는 게 좋은 거 같아요. 밥을 먹을 때도 밥그릇부터 보는 학문이라 그런지 우리말만으론 쉬이 생각의 경계를 넘나들기 힘든 듯. ㅎㅎ
그나저나 위에 강준만 팬클럽 분이시네~ 난 아치 누나가 좋아~ㅎ

Arch 2009-10-15 09:58   좋아요 0 | URL
바밤바님은 왜 뽀 서재에서 뜬금 고백? ^^ 그리고 누나라고 하지 말아요, 모두들(누가! 누가! 대체 누가!) 제가 상큼발랄한 어린 처자인줄 알고 있다구요! (제가 아침에 약을... 쿨럭)

Forgettable. 2009-10-15 10:02   좋아요 0 | URL
시간이 좀 오래 걸리지만, 서양철학 이해하기엔 영어가 낫죠. 오히려 단어 같은경우엔 쉬울 때도 있더라고요 ㅎㅎ 지금은 손 놓은지 오래라 이런 말 하기도 부끄럽지만 ㅋㅋㅋ
근데 일찍 일어나시네요... -_-

Forgettable. 2009-10-15 10:20   좋아요 0 | URL
그러게? 대체 누가?!!!!!!!
상큼발랄을 내껀데?????????
(저도 아침에 밥을... 못먹;;) 오타까지 냈네 ㅋㅋㅋㅋㅋㅋㅋㅋ

Arch 2009-10-15 11:15   좋아요 0 | URL
그럼 상큼발랄은 아침밥 못먹은 뽀님이 하고, 어린은(응?) 약 못 먹은 내가 하고. 흐~

바밤바 2009-10-15 12:40   좋아요 0 | URL
알았어요~ 아치님 ㅋㅋ 군산 파이팅!!

순오기 2009-10-15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서를 못 읽는 나는 이런 감정을 죽었다 깨도 모를 것 같아 조용히 추천만...^^

Forgettable. 2009-10-15 10:06   좋아요 0 | URL
대신 순오기님은 제가 죽었다 깨도 모를 것 같은 꼼꼼하고 세심한 면모를 갖고 계시잖아요 ^^

Tomek 2009-12-04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마르케스 소설 읽어봐야지 생각했었는데...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한 권 밖에 읽어보지 못했어요. 그것도 영화 『활』, 『시간』보고나서 관련 서적이라 생각하고 읽어봤는데.. 한 번 도전해 보려고 『백년동안의 고독』첫 페이지를 들쳐보고 수형도같은 가족관계를 보고 그냥 덮었습니다. ㅡ.ㅡ;

언제 한 번 맘잡고 읽어봐야겠어요. ^.^;

Forgettable. 2009-12-04 14:17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에 그 가족관계를 보면서 아연해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책 읽으면서 그 표가 무척 도움이 되더라구요. 전 개인적으로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가장 무덤덤하게 읽었던 기억입니다. ㅎㅎ
가볍게(책 무게가요^^)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나 로맨스인 [사랑과 다른 악마들], [콜레라시대의 사랑] 이 두 작품도 맘 굳게 먹지 않아도 잘 읽히고요- ^^;

[시간]은 김기덕감독 작품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