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
수키 김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너무 이른 시각이라 술을 팔지 않는다는 가게의 테라스에 앉아 술 팔기를 기다리며 가벼운 탐색전을 벌인다. 만난지 30분도 안되어 대뜸 빨간 책을 꺼내어 들며 첫문장을 읽어보라고 들이미는데, 이거 참 마음에 안드는 문장이어도 감탄하는 척 해야할까, 란 생각이 드는 이상하고 요상하고 어색한 분위기에서 읽어버린다. 

   
  오전 9시의 담배는 절망감의 표현이다.  
   

이건 탁월한 문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전 9시에 공허한 마음으로 담배연기를 내뿜는 나의 절망을 상상케 하기 때문에 괴로운 문장이다. 내가 흡연가였던가는 이미 상관할 바가 아니다. 게다가 정말 이 문장이 괜찮은 문장인 이유는 이 문장과 그녀와 나와의 일체감을 이 어색한 순간뿐만이 아니라 책을 읽는 내내 느낄 것이라는 걸 암시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녀를 이해하는 것은 상관 없이 난 그녀를 온마음으로 느낀다.   

작가는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조각조각난 마음들을 주인공이 춤을 추듯 하나씩 주워 올려서 수습해나가는 모습을 아주 무미건조한 문체로 보여주는데, 이런 딱딱한 문장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가 되기는 참 쉬웠다. 그리 따뜻한 시선을 갖지도 않은 작가를 따라 난 그녀의 손을 붙잡고 한 인간이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사건들을 같이 겪는다. 그녀는 내게 감사해야 할 것이라고 믿게 되어버린다, 내가 옆에서 손 꼭 붙잡고 우리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속 힘을 불어 넣어줬으니까. 

그리고 그레이스. 한번도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수지의 입장에서만 서술되는 타자. 그러나 수지를 수지이게 한 장본인인 언니이다. 이렇게 중요한 사람이 대사 하나 없이 현실세계에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그 어느 누구보다 서사의 중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소설계의 작은 혁명이 아닐까,  

주인공만 알고 있는 감춰진 과거의 사건들을 감질나게 보여주면서 이미 주인공에 완벽하게 이입을 한 독자들을 약올리고, 알면 괘씸해서라도 책을 탁 덮어버리면 그만이련만, 그러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작가의 마수같은 문장들에 얽혀버려서 책 안으로 끌려들어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내가 누군지, 내 뒷목덜미에 소름이 돋던지 말던지도 신경쓰지 못하게 되버리고 만다. 뭐 하나 같이 공감하는 것 하나 없음에도 그녀를 오롯이 느끼게 되는 전율, 독서를 할 수록 느끼기 힘들어지는 자극을 오랜만에 받았다.  

애국심이나 뭐 인종차별, 마음붙일 데 없는 .(쩜)5세대들, 도덕성과 이기심, 뭐 이런 사소한 문제들은 신문보면서 생각해도 되니까 일단은 딱딱해 보이지만 포근한 담요같은 작가의 품속으로 뛰어들어 보자.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빠져나올 수 없는 늪, 덫, 그물, 거미줄, whatever.. 에 걸리고 말 것이라는 걸 당신이나 나나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이런 책에 질식사라면 언제든지 두손들고 대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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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10-07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지금 책 읽다가 갑자기 잊혀지는님이 <통역사>리뷰를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알라딘 들어와서 확인했는데, 빙고- ^^ 이 책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작가가 자신의 인생에 그 소재와 주제를 빚지고 있어서, 작가에 대한 평가를 망설이게 하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두번째 작품이 무지 기다려져요. 혜성같이 나타는 젊은 미녀 한국인 교포 작가의 두번째 소설은 왜 안나오는건지. 나오기만 해봐라, 냅다 사버릴테니, 하고 기다리고 있다죠.

Forgettable. 2009-10-07 09:24   좋아요 0 | URL
아.. 책 따라하려고 멋있는척 하다 망한리뷰- 라고 어제 밤에 좌절하며 잠들었는데, 새벽녘에 벌써 보셨군요! 그런데 그 텔레파시는 뭐랍니까; 진짜 신기하네요 ㅋㅋㅋㅋ 제가 이거 쓰면서 계속 하이드님 생각했는데 정말로 전해졌나봐요-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지나니, 아멘-

다음 작품도 괜찮을 것 같다고 믿습니다(!?). 오늘 왜이리 사이비 종교느낌의 댓글일까..
저는 원서가 엄청나게 궁금하네요, 원서를 읽으며 차기작을 기다려볼랍니다.

2009-10-07 0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07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07 1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07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10-07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집에서 내가 수지 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했어요.
참 좋았는데 어서 다음 작품이 나왔으면..

Forgettable. 2009-10-08 09:14   좋아요 0 | URL
수지 같은 사람이라니.......... 언니와 오빠들에게 이쁨받는 막내 스타일은 분명 아닌데요;;;;;;;;
자매의 이야기를 참 잘 담아냈죠.

암튼 밑도 끝도 없이 좋다, 읽어라- 라니.. 제 리뷰도 참-_- 자기 반성이 필요할 것 같아요. ㅋㅋ

무해한모리군 2009-10-08 10:47   좋아요 0 | URL
전 집에서 좀 방관자적이거든요.
대충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해버리는 것들도 많고..

Forgettable. 2009-10-08 13:36   좋아요 0 | URL
제 동생이랑 비슷하네요 그런건;;;
제가 그레이스를 보며 오오(! 감탄사에 많은 의미가...) 하던 것과 비슷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