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가 내리던 여름날 만났을 때 우산이 없는 척을 했고 우산 하나를 나눠 쓰면서 살짝 팔을 잡았다. 우리가 만난, 수도 없는 날들 중 하루 어느 날 밤에는 상수의 바에 앉아서 진토닉을 마셨다. 신청곡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그 사람은 헤드윅의 디 오리진 오브 러브를 신청했고 난 헤드윅의 감독이 한국에 와서 콘서트를 했을 때 혼자 가기도 했다며 내가 이 노래를 더 좋아한다며 토로했는데 사실 노래보다 더 좋았던 건 그 사람이었다. 말하지 않았지만 알아차릴 정도로 커져버린 내 마음 때문에 우리는 돌이킬 수 없이 멀어졌다. 한 동안 보지 않다가 내가 스페인에 가기 전 열었던 생일파티에 와서는 헤드윅 ost 시디를 선물로 주었다. 나는 노트북에도 cd플레이어가 없는데, 우리의 추억은 플레이할 수 없는 시디에 들어있는 음악처럼 묻어두어야겠구나.. 그렇게 그 사람에게 안녕을 고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기억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제목인 “겨울”과는 상관없이 자꾸 머릿 속에 여름이 지나갔다. 그 중 병렬독서를 하던 <황금방울새>의 시오와 보리스의 여름도 있었고.. 위에 언급한 나의 여름날 짝사랑도 있었다. 손을 뻗어도 이젠 부여잡을 수 없게 된 어린 날의 기억들은 사라져가고 아련한 느낌만 남았는데 이 책은 어린날의 불안한 기분을 기억하게 만든다. 괴물: 대체 왜 그런 사람에게 빠진걸까 싶었지만 나 역시 그런 애틋함과 트라우마를 동시에 주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어느 겨울 다섯 번의 화요일: 마지막에 퀼트 이불을 빠는 장면이 왜인지 계속 기억에 남는다. 도르도뉴에 가면: 가장 좋았던 단편. 해피엔딩과 새드엔딩이 교차하며 지나간다. 독자로서는 평생 알 수 없는 새드엔딩의 스토리가 궁금하기도 하다. 하지만 묘사되지 않은 그들의 마음을 상상만 해도 마음이 저민다. 북해: 이 단편에서는 힘을 살짝 뺀다. 휴가 왔음에도 일상의 지리멸렬함이 갑자기 등장. 엄마의 마음이란 다 그런걸까..타임라인: 마지막 장면에 모두가 다 모인 장면은 희곡의 클라이막스 같다. 조금 작위적이었지만 재미있었다. 시애틀 호텔: 하아.. 이런 이별이라니. 차라리 평생 그리워하는 게 낫겠지만 이런 종지부가 필요한 관계도 있다. 깨끗하게 묻어두고 행복해라 주인공. 네가 과거의 늪에서 빠져나와 빛을 향해 휘적휘적 나아가는 동안 아마 상대방은 자기혐오의 늪에 빠져 그저그런 삶을 살게 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