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대에 선 그리스도 - 우리의 판단을 뒤흔드는 복음에 관하여 로완 윌리엄스 선집 (비아)
로완 윌리엄스 지음, 민경찬.손승우 옮김 / 비아 / 2018년 8월
평점 :
품절


"..시인들은 '무덤 뒤의 찬란함'에 자주 도취하면서도, 현실에서는 그 빛을 일상적 실천의 등대로삼는다. 언제나 물질의 제약을 받는 이 세상에서 그 찬란한 빛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도달할 수 없는 곳을 향해 가는 발걸음은 바로 그 도달할 수 없는 사실 때문에 결코 멈추어지지 않는다. 시인들에게는 다른 세계의 빛이 이 세계의 실천을 지시한다." (황현산, <사소한 부탁>, 34.)


이 책은 2001년 캔터베리 대주교가 선정한 사순절 도서이다(지난달에 출간한 <순례를 떠나다>는 2002년 선정 도서이다. 덧붙이면 미로슬라브 볼프의 <베풂과 용서>(복 있는 사람, 2008)은 2006년 선정 도서이다). 잉글랜드 성공회에서는 1983년부터 캔터베리 대주교가 명망 있는 사목자/신학자/수도사에게 사순절에 함께 묵상할 수 있는 책을 1년 전에 의뢰해 사순절 시기를 앞두고 출간하는데 로완 윌리엄스는 1983년과 2001년 두 번 의뢰를 받았다(2018년 현재까지 두 번 의뢰를 받은 이는 로완 윌리엄스가 유일하다. 1983년 저작은 ‘평화’에 대해 성찰한 <하느님의 휴전>The Truce of God인데 이 책은 로완의 정치/공공 신학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저작으로 꼽힌다).


‘사순절 선정 도서’이기는 하나, 주제와 내용은 모두 저자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그렇기 때문에 잉글랜드 성공회에서 ‘사순절 도서’로 선정했다고 해서 반드시 한국 독자들이 사순절에만 선정 도서들을 읽을 필요는 없다). 로완 윌리엄스의 전체 저작 목록에서 이 책이 갖는 특징은 그가 복음서를 집중적으로 다룬 흔치 않은 저작이라는 점이고, 두 번째는 그가 직접 쓴 저작이라는 것이다(대다수가 놓칠 수 있는 점은 지금까지 나온 로완의 대부분의 책, 한국에 소개된 로완의 책(<신뢰하는 삶>,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제자가 된다는 것>,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은 대부분 강연을 녹취하거나, 필사한 강연집이라는 것이다. 하다못해 <기독교 영성입문>이라는 밋밋한 제목으로 소개된 <상처입은 앎>Wound of knowledge또한 강연에 기반을 둔 저작이다). 강연과 원고의 차이는 ‘구성’과 ‘호흡’에 있으며 여러 강연을 모아 놓은 책일수록 ‘호흡’에 커다란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여러 호흡을 한 호흡처럼 만드는 게 편집자의 주된 업무일 것이다). 물론 둘 모두 ‘책’으로 나왔을 때는 저자 본인, 편집자의 손길이 깃들기 마련이므로 호흡의 차이는 최소한으로 줄어들지만, 아무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구상을 하고 일관된 호흡으로 쓴 책과 강연집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캔터베리 대주교 재임 이후 로완 윌리엄스의 강연은 한결 ‘대중친화적’이 되었다(물론 기포드 강연과 같은 아주 어려운 강연도 있긴 하지만). 좋든 안 좋든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교>는 로완 윌리엄스가 ‘대중’을 더 많이 의식하기 ‘전의’ 작품이다. 하여 이 책은 ‘대주교’가 되기 전 ‘학자/주교’로서 로완 윌리엄스가 본인 고유의 인장을 가지고 복음서의 법정 장면을 일관된 호흡으로 성찰한 ‘책’이라 할 수 있다.


(3) 신학 전공자들은 알겠지만 예수의 법정 장면들‘만’을 따로 다룬 책들은 그리 많지 않다(물론 빌라도의 저 유명한 질문(진리가 무엇인가?)을 다룬 책들은 많으며 그러한 면에서 이 책과 견주어 볼 몇 가지 책들이 있다. 조르조 아감벤이 쓴 <빌라도와 예수>(꾸리에, 2015)는 그 대표적인 경우다). 이른바 ‘마에스트로’ 고유의 질감과 성향을 감지할 수 있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두가 공통적으로 택하는 레파토리에 어떻게 본인 고유의 해석을 깃들이는지를 보는 것, 다른 하나는 본인 특유의 레파토리를 어떻게 만들어나가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의 특색을 맛보려면 ‘베토벤 교향곡 9번’이라는 곡을 두고 카라얀이나 푸르트벵글러와 같은 지휘자들의 연주를 들어본 뒤 듣는 방법이 있고, 다니엘 바렌보임만 택하는 레파토리를 살피는 방법이 있다(피에르 불레즈나 엘리엇 카터와 같은 현대 작곡가들의 곡을 연주하는 것). <신뢰하는 삶>이 전자(일가를 이룬 신학자들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통상 하는 ‘신경’해설)라면,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는 후자에 해당한다.


나는 번역/편집할 때 위와 같은 부분들을 ‘염두에 두고’ 진행했다. 물론 이 책과 관련해서는 이러한 스케치로는 담을 수 없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편집자 생활을 시작하며 낸 책이 <신뢰하는 삶>이었고 5년차에 이른 시점에 낸 책이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이다. 우연이지만, 지난 5년간 ‘로완 윌리엄스’라는 이름은 내 인생 여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로완 윌리엄스를 여러 가지로 수식할 수는 있겠지만, 내게 로완 윌리엄스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 한 마디가 이 세상 그 어느 것에 비견할 수 없는 ‘말’임을, 우리가 평생에 걸쳐 곱씹고 삶에 녹아내야 할 무언가임을 (낯설지만 새롭게, 그리고 그리스도교 전통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긍정하는 방식으로) 알려준 이, 내가 언젠가 심판대에 섰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참회와 찬미뿐임을 깨닫게 해준 이다(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학자/사목자(그가 로마 가톨릭이든, 성공회든, 장로교든 감리교든 침례교든 그 무엇이든)의 척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간의 표현을 조금 바꾸어 말하면 신학자, 사목자가 예수의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되새기지 못한다면 우리가 사랑받는 존재이며그 사랑에 응답하는 존재로 빚어가는 하느님의 활동에 우리를 참여시키지 못한다면 그 신학자/사목자의 활동은 무력한 활동이며, 그 자체로 불행이다). 그의 신학이 어렵다면 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 가리키고자 하는 바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 지점에 가기를 망설이고, 의혹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거부하고, 우리 자신의 편의를 위한 도구로 삼는 우리 자신, 우리가 스스로 세워둔 여러 ‘장벽’들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그리고 이를 어떻게 복음이 ‘뒤흔드는지를’)세밀하게 살피기 때문일 것이다. 황현산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물질의 제약을 받는 이 세상"이 "찬란한 빛"을 자주 가림을 응시한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는 그 빛에 우리 자신을 열 수 없음을, 우리 자신을 버리지 않고서는 그 빛의 초대에 응할 수 없음, 그곳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황현산과 달리) "도달할 수 없음"에도 그곳을 향한 발걸음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빛이 '이미' 이 세계에 왔으며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빛은 우리의 원천이며, 우리를 지탱하고, 우리를 새로이 빚어낸다. "다른 세계의 빛"은 이 곳의 빛이 되어 "이 세계의 실천을 지시한다". 로완은 이 빛에 우리 자신을 열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진리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생명과 새로운 삶을 주는 유일한 힘인 그분의 손에 우리를 맡겨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익숙하지 않은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신뢰는 우리가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고 이를 받아들일 때만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진리는 우리의 응답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자유다 자유! 그가 너를 기다린다!”

당신은 이제 자유롭습니다. 그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 241)


이 책이 ‘그’를 향한 발걸음에 작게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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